대형 로펌 등이 200~3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서면을 법원에 내는 ‘서면폭탄 변론’ 행태가 사라져 가고 있다. “30쪽을 넘기지 말라”며 대법원이 올 8월부터 준비서면 제한 방침을 시행한 지 두 달 만에 이런 흐름이 뚜렷해졌다. 변호사가 많이 써내 봐야 소송 결과가 좋지도 않다는 통계도 나왔다.
28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대법원에 올 9월 첫째 주와 10월 첫째 주 들어온 상고이유서 중 30쪽 초과 건수 비율은 각각 3%(전체 465건 중 14건), 1.2%(422건 중 5건)로 집계됐다. 30쪽 제한 방침 시행 전인 7월 분량 초과 비율 5.6%(390건 중 22건)에 비해 갈수록 감소세다. 이런 경향은 1심인 서울중앙지법 재판(민사합의)에서도 확인된다. 서면 30쪽 초과 비중은 7월 첫째 주 6.2%(전체 696건 중 43건)였는데, 9월 첫째 주에 3.9%(전체 786건 중 31건)로 줄었고 10월 첫째 주에는 2.3%(820건 19건)로 더 감소했다. 40쪽 넘긴 경우는 7월 66%에서 10월 36%로 30%포인트나 줄었다.
특히 서면 폭탄의 주범으로 꼽히던 대형 로펌들의 30쪽 초과 사례가 쪽수 제한 시행 뒤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 법원 측 얘기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형 로펌이 반복해서 내는 준비서면 분량은 수백 쪽인 경우가 허다했지만 최근 현저히 줄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 1~6권 로펌의 상고이유서 분량 위반 건수는 9월 5건, 10월에는 단 1건에 불과했으며, 그 양도 40쪽을 넘기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에서도 대형 로펌이 위반한 건수는 9월에 15건이었으나 10월에는 단 3건이었다.
분량이 많다고 재판 당사자들에게 유리할 게 없다는 점도 통계로 확인됐다. 대법원 사건 중 지난 7월 30쪽 초과 상고이유서 접수사건 22건 중 72%(16건)가 대법관이 심리도 없이 사건을 물리치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끝났다. 지난해 민사사건 심리불속행 기각 평균 비율 60.7%을 크게 웃돈다. 수도권 법원의 A 부장판사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보면 상대를 깎아내리는 내용이나 의뢰인의 하소연을 그대로 담는 경우가 많고 구글에서 찾은 논문을 긁어서 낸 자료 등 불필요한 것들이 많다”며 “핵심을 쉽게 파악하도록 쟁점 위주로 정리를 잘하는 것이 소송에서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변호사들은 그간 의뢰인의 눈치를 보며 경쟁하듯 자료 양을 늘려서 판사 앞에 내는 일이 잦았다. 일부 대형 로펌은 시간끌기용으로 방대한 서류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제동을 걸었다. 민사소송(가사ㆍ행정소송 포함)에 한해 원고의 소장과 피고 답변서에는 제한을 안 두되, 추가 준비서면이나 상고이유서는 30쪽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민사소송규칙에 신설해 올 8월부터 시행해왔다. 대형 로펌들은 요즘 판사에게 밉보이거나 “양을 줄여 다시 내라”는 지적을 받지 않으려 자간이나 줄 간격을 줄여 30쪽 안에 밀어 넣기도 한다고 판사들은 전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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