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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해 준 어르신 “나락 언제 베냐”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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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해 준 어르신 “나락 언제 베냐” 물어

입력
2016.10.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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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해 준 어르신 “나락 언제 베냐” 물어

동네 동생에 부탁했다고 하자 “그건 원칙이 아녀”

“눈이 게으르고 손이 보배여”

쳐다 보고만 있으면 해결될 일 없다는 진리

농장 앞 논에서 벼 수확작업이 진행중이다. 가을에 반갑지 않은 비가 자주 내려 품질에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수확 작업에도 지장을 준다.
농장 앞 논에서 벼 수확작업이 진행중이다. 가을에 반갑지 않은 비가 자주 내려 품질에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수확 작업에도 지장을 준다.

뒤에 따라오던 승용차가 안달이 났다. 병원 앞 로터리를 지나면서 길이 좁아지는 줄도 모르고 2차선으로 질주하려다가 멈칫 하는 모습이 옆 거울로 보였다. ‘구례사람은 아니구만’ 생각하고 운전하는데 삼거리를 지나서도 뒤를 쫓아왔다. 반대편에서 드문드문 오는 차 때문에 추월도 못하고 하이빔만 번쩍거리며 바짝 붙어왔다. 트럭 엉덩이를 범퍼로 핥을 기세다.

소용없다. 제한속도가 시속 60km인 도로이고, 계기판 속도계도 ‘60’을 가리켰고, 무엇보다 내 트럭이 그 이상 잘 안 나간다. 잠시 후 농장 쪽으로 들어가려고 왼쪽 깜박이를 켜니 앞지르려다가 또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린다. 불빛에도 성질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레이저 총이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쏘는 모양이다. 속도를 줄여 좌회전 하는데 지나가다 창문을 내리고 뒤로 돌아보며 뭐라고 했다. 그런 표정으로 덕담을 할 리 없다는 정도만 이해하고 내 갈 길을 갔다.

논 가에 눈에 익은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번호판을 확인하니 구 이장님 세단이다. 어디 계신가 둘러보니 논두렁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계셨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허리는 구부정하시지만 다리가 길어서 걷는 모습이 흑두루미처럼 보인다. 느릿한 걸음이지만 훅훅 다가 오시는 느낌이다. 공부를 즐기시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라 모르시는 게 없고, 가끔 컴퓨터 문서 프로그램인 엑셀의 함수 공식을 물어보셔서 당황스럽게 하실 때도 있다. 뭐든 “어쩌죠?”하고 여쭤보면 “괜찮어. 아무 문제 없어” 라고 답하실 때가 많고, 말씀을 들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아무 일 없을 때가 많았다. 멘토보다는 스승님에 가까운 분이다.

주변 논들은 나락을 거의 다 벤 상태인데 구이장님 논만 독야청청 남아 있었다. 그동안 나락 베는 시기를 구이장님 논에 맞춰 왔다. 나보다 모내기를 일주일 먼저 하셨으니 나는 일주일 뒤에 하면 된다 하는 식이었다. 여쭤보지 않아도 구이장님 논에 나락이 서 있으니 나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아버님 나오셨어요?” 지척에 오셔서야 나를 보셨다. 내내 논 가장자리를 내려다보며 걸어 오신 탓이다. “잉, 자네구만.” 표정이 어두웠다. “나락 언제 베신대요?” 여쭈니 “글씨말여. 좀 늦었구만. 논에 물이 많아.” 그제서 보니 논에 아직도 물이 흥건했다.

이장인 친구가 농장에서 고구마 수확에 이용할 쟁기를 경운기에 붙이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이장인 친구가 농장에서 고구마 수확에 이용할 쟁기를 경운기에 붙이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논이 마르지 않으면 콤바인 작업이 어렵다. 벼를 베는 장갑차 같은 기계가 콤바인이다. 바퀴 대신 탱크처럼 궤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웬만한 진흙에서도 작업이 가능하지만, 한번 빠지면 탱크만큼 무거워서 꺼내기도 힘들다. 벼를 수확할 시기가 안돼서가 아니라, 늦었는데 못 베고 계셨던 거다. 그 와중에도 나락을 베야 할 시기를 짐작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나락을 붙들고 있는 줄기가 파란색이면 아직 괜찮고 ‘놀짱(노르스름)허면’ 베야 된다고 하셨다.

같이 걱정해드리는 것 외에 도와드릴 게 없어서 잠시 말씀 나누다가 농장으로 왔다. 몸에 좋다는 가을볕은 만난 지 오래됐고, 일부 캐낸 고구마는 안개 속에서 아직도 젖은 흙을 두르고 있었다. 땅이 포실포실 해야 뭘 캐도 좋고, 볕이 좋아야 막판 과일 당도가 좋다는데 이번 가을은 젬병이다. 구이장님의 “늦었다”는 말씀에 덜컥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콤바인 작업을 해주겠다는 동생에게 전화해 일정을 확인했다. “아무 때나 형님 괜찮을 때 한 이틀 전에만 말씀허씨요.” 마음이 놓였다. 커피 한 잔 하고 싶어 물을 끓이며 라디오를 켰다. “가을은 역시 비 내리는 날이 분위기 그만이죠. 이런 날은 술 한 잔 생각나시죠?” 라디오를 바로 껐다. ‘비 오는 날 공 치는 날인데…’ 아침부터 홧술이 댕겼다.

이것 저것 가을 수확물을 판다고 알렸고, 주문이 들어왔다. 아직 다 거두지도 못했는데 주문은 쏟아졌고 할 일은 산더미였다. “눈이 게으르고 손이 보배여” 하시던 오봉댁어머니 말씀처럼 쳐다보고 있어봐야 해결될 일은 없었다. 고구마의 흙을 솔로 털어내고 저장고에 뒀던 밤을 꺼내 다시 선별 작업을 하는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친구의 주문이 들어왔다. “단감, 대봉 1박스씩하고 고구마 10kg, 백미 현미 20kg씩. 똑같은 걸루 우리 엄마한테도 부쳐주고. 택배비 총 2,000 합쳐서 입금 완료!”

수확물을 포장하고 발송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수확물을 포장하고 발송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주문을 받으면서 택배비는 절반씩 부담한다고 알렸고, 보통 건당 4,000원이니 2,000원을 보태면 된다고 알렸다. 친구의 주문에 따르면 대강 박스는 10개 포장을 해야 하니 택배비도 20,000이 되는 셈이다. 성격 좋고 이해력은 부족인 경우다. 이해력은 뛰어난데 성격이 더러우면 친구도 안 했을 것 같아 아무 말 안하고 “ㅇㅋ”를 찍어 보냈다.

어찌 보면 물품의 가격과 발송 방법 모두를 내가 정했고, 내 것을 먹고 싶다면 내 룰에 따르라는 거만과 독선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게 싫다거나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걸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뭔가 잘못해서 혼낼 때도 애초에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 잘못 될 걸 알면서도 그랬는지를 먼저 묻는다. 결과를 떠나서 애초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해하고, 방법이 잘못 된 것이었다면 아빠가 생각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준다. 시행착오는 아이들의 특권이고, 사실 나도 아직 반복하는 중이다. 단, 과정과 설명에 거짓말이 포함돼 있으면 용서하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 그런 적은 없다. 친구의 메시지엔 거짓도 없었고 나쁜 의도도 없었다. 다음에 주문할 때 친구가 거듭 실수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 주는 건 내 몫이다.

농장에서 수확중인 고구마. 가을에 반갑지 않은 비가 자주 내려 품질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갈무리 작업에도 손이 많이 간다.
농장에서 수확중인 고구마. 가을에 반갑지 않은 비가 자주 내려 품질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갈무리 작업에도 손이 많이 간다.

고구마 두어 두둑 캐서 정리하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여름에는 해가 뜨거워서 힘들고 가을은 해가 짧아서 힘들다. 농막에서라도 조금 더 해야지 하면서 들어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두드렸다. 아무리 두들겨도 진동을 뼈가지 전달하지 못하는 허벅지를 원망하는데 이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이구 원사장~”하기에 “아이구 이장님~” 받아줬다. “됐고, 얼른 00가든으로 오라구. 아버님이 고기 사주신대.” 귀에 술냄새가 들렸고, ‘아버님’이 누구네 아버님인지 몰랐지만 후딱 일어섰다. 아마도 ‘고기’가 주는 힘인가 보다.

식당에 도착해보니 논 갈고 모내기 해주신 동네 어르신과 이장, J형님이 있었다. 짧게 인사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불판에 고정됐고 머릿속은 ‘더 익히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뿐이었다. 아버님과 이장은 전작이 있었고, J형님은 안주보다 소주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고기 먹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차를 가져와 술도 사양하며 고기에 전념했다.

J형님이 빈 잔을 들이밀며 물었다. “유헌이 니 컨테이너 필요하다고 안 했냐?” 컨테이너란 사람 들어가는 철제 구조물이 아니라 과일이나 열매 수확할 때 담는 플라스틱 박스를 말한다. “울 집에 안 쓰는 거 10개 정도 있응게 가꼬 가” 급히 마신 J형님도 시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쪽 눈에다 시선을 맞출까 고민하며 “예, 쓰고 갖다 드릴게요.” 답했다. J형님은 반 박자 늦게 펄쩍 뛰더니 내 이마 께를 보며 말했다. “일단 가꼬 가란 말이다. 그라고 잘 쓰고 가만 있어. 그라믄 내가 까묵을 거 아니냐. 그라믄 니꺼 되는 것이여. 안 그냐? 너 바보지?” 형님은 나름 논리 정연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한참 말씀이 없던 어르신이 물으셨다. “자네 나락은 언제 벨 건가?” “네, 나락 베는 건 다른 동생에게 부탁했습니다. 바쁘실 것 같아서요.” 동네에서 논에 필요한 기계 일을 해 주던 형님이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었고, 일감이 어르신에게 몰릴 것 같아 옆 동네 동생에게 부탁을 해 놓은 차였다. “그려?” 하시고 한참을 말씀 없이 소주를 드시던 어르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믄 그렇게 혀. 근디 그것은 룰이 아니여.” 무슨 뜻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말씀을 이으셨다. “봄에 논 갈고 모내기 헌 사람이 나락 베는 것까지 마치는 게 원칙이여. 자네가 다른 이에게 맡겼다니까 그렇게 하지만 룰을 알고는 있는 것이 좋겄제?”

들깨가 익어 씨주머니가 검은 색을 띄고 있다. 들깨를 베서 말리고 털어 정리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들깨가 익어 씨주머니가 검은 색을 띄고 있다. 들깨를 베서 말리고 털어 정리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봄철 논 작업에 비해 그나마 콤바인 작업은 수월한 편이라 거기까지 한 세트로 친다고 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어서 잠깐 자리에서 나와 옆 동네 동생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미안허네만 지금 이런 말씀을 들었는데 어찌 하는 게 좋을까 해서.” 동생은 그게 원칙으로 맞다고, 자기는 다 양해된 걸로 알았다고, 자기도 무척 바쁜데 잘 된 일이라고 했다. “나헌테 미안할 일 아닌게 걱정마쑈.” 들어와서 어르신께 ‘나락도 베 주시라” 말씀을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짧고 굵게 먹고 일어나 다시 농막으로 왔다. 저장고에서 밤을 꺼내와 다시 선별작업을 하는데 D동생이 들어왔다. 손에는 신문지를 구겨서 들고 있었다. “형님, 여적 머 허신대요. 멀리서 봉께로 불이 켜져 있어 올라왔구마요. 식사는 하셨대요?” 동생은 신문지를 조심스레 펼쳤고 송이버섯 하나가 들어 앉아 있었다. “형님 금년에 송이 맛 좀 보셨대요? 누가 두 꼬타리 주길래 형님 맛 좀 보시라고.” 고마웠다. 꼭 송이를 줘서 그런 건 아니다. 누구에게 뭔가를 주면서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구례에서 가을에는 개도 송이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근데 물고 다니기는커녕 이렇게 얻어먹으니 개만도 못 한 건가. 하긴 개도 누가 주니 얻어먹지 지가 캐러 다니겠나. 나도 개 정도 신세는 된다고 위안했다.

동생은 요즘 대통령 관련 뉴스 얘기를 꺼냈다. “형님, 너무한 거 아닌가요?” 요즘 으레 하는 얘기니 빙긋 웃어줬다. “이게 웃을 일이다요? 대통령 사과문 들으셨지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거 미안허다고 안허요.” 뭔 얘기를 하려고 하는 지 동생을 쳐다봤다. 이유 여하를 막론한다는 얘기는 이유를 다 떠나서 얘기하자는 거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게 미안하다는 것에는 그 ‘이유’가 원인이라는 얘기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라는 말은 이유가 좋은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쓰는 말이란다. “절대로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란게요. 느그덜이 잘 몰라서 그란가 본디, 기분 나빴다면 사과헐게 이말이라. 주변에 바른말 하는 사람이 없다대요. 허긴, 쫓아가서 가르칠 수도 읎고...”

쌈이라도 싸 먹으려고 무를 솎아 집에 가져왔더니 아내가 열무김치를 담갔다. 맛도 모양도 제법 김치스럽다.
쌈이라도 싸 먹으려고 무를 솎아 집에 가져왔더니 아내가 열무김치를 담갔다. 맛도 모양도 제법 김치스럽다.

정말 혼란스러운 시기다. 웃을 일이 드물다. “요즘엔 여러 가지로 뉴스 보고 있기도 힘드네” 했더니 동생이 맞장구 치듯 얘기했다. “형님, 이꼴 저꼴 안 볼라믄 걍 일찍 죽어야 써.” 곁눈질 하며 씩 웃는다.

그래 죽지 못하니 웃고 살지 뭐. 그나 저나 송이 향은 좋다. 뭐 그까이꺼.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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