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늙지 않는다. 70년 역사를 이어온 교향악단과 나이 아흔에 가까운 노지휘자의 연주였고 곡목도 닳고 닳은 베토벤의 ‘운명’과 ‘전원’이었지만, 그 음악에서 노쇠하거나 진부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6일 독일 굴지의 명문 교향악단인 밤베르크 교향악단이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지휘에는 악단의 명예지휘자인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스웨덴 출신으로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 독일-오스트리아 정통 레퍼토리와 시벨리우스, 그리그, 닐센 등 북유럽 음악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쳐온 관록의 노장이다.
필자는 4년 전 도쿄 산토리홀에서 이들 콤비의 공연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블롬슈테트는 나이(89)를 무색케 하는 활기찬 움직임과 명확한 지시로 탄탄한 연주를 이끌었고, 밤베르크 교향악단은 독일 명문악단다운 중후한 사운드와 견실한 앙상블로 지휘자에게 호응했다. 당시 밤베르크 교향악단에게서 ‘독일 악단 고유의 전통과 미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악단’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묵지근하면서 수더분한 맛과 소탈한 멋이 우러나는 연주에서 과거 아날로그 음반으로 접하던 독일 악단들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내한공연에서 만난 밤베르크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익히 들어왔던 중후한 사운드 대신 현악 파트의 비브라토를 절제하면서 한결 담백한 사운드를 들려준 것이다. 근래 현대악기 오케스트라가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의 연주방식을 차용하는 이른바 ‘절충주의’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기는 했지만, 전통적 이미지가 강했던 밤베르크가, 그것도 블롬슈테트의 지휘로 이런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1부 ‘전원 교향곡’에서는 그 모습이 얼마간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특히 1악장이 그랬는데, 아마 단원들이 낯선 공연장에 적응이 덜 된 탓도, 필자가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악장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연주자와 감상자는 접점을 찾았다. 블롬슈테트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과 힘찬 동작으로 연주를 이끌면서 세부의 뉘앙스까지 꼼꼼히 짚어 나갔고, 단원들은 그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간간이 서로 미소를 주고받을 정도로 즐기면서 연주에 임했다. 그 연주에는 명확한 윤곽과 탄력적인 리듬, 유연한 흐름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지휘자가 빚어낸 밝고 쾌적한 음감과 단원들의 자발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2악장은 관객들을 하일리겐슈타트의 시냇가 대신 밤베르크의 레그니츠 강변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2부 ‘운명 교향곡’은 한층 더 탄탄하고 강렬한 연주였다. 일단 현악 파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1부에서는 상황에 따라 비브라토를 적당히 가감했던 데 반해 2부에서는 비브라토를 극력 배제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단하고 옹골찬 사운드는 곡 특유의 박진감과 긴박감을 더욱 생생하게 부각시켰다. 1악장 종결부에서 현악 성부들의 어지러운 교차를 첨예하게 부각시켜 비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한 블롬슈테트의 집중력, 2악장 주제선율을 늠름하고 멋들어지게 부각시킨 첼로 파트의 유니즌 등이 특히 돋보였다.
밤베르크는 앙코르로 연주한 ‘에그몬트 서곡’에서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이 거침없이 뿜어내는 중후한 사운드는 반가움과 함께 공연에 대한 만족도를 한 단계 더 높여주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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