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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철로 단상

입력
2016.10.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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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수도권 광역전철로 편입된 경의선(경의ㆍ중앙선으로 개칭)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오랜 역사의 철도이기도 하거니와,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모두 지상이다. 출근길 일산역 플랫폼에 서면 일산시장 쪽 구일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신도시의 정형화된 풍경과 많이 다르다. 무당집 깃대 같은 것도 보이고, 오래된 초등학교의 교실 유리창도 보인다. 주로 서울 방향 앞쪽 칸을 이용하는데 열차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면 플랫폼 끝, 서울 방향 철로가 뻗어 있는 난간으로 간다. 전기 장치로 연결된 직사각형의 철골 구조물들을 위에 두고 여러 줄의 철로가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 끝은 살짝 오른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가끔은 문산행 열차가 그 끝을 다시 물고 나타나 이쪽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해나 구름이 이루는 하늘의 풍경이 다를까, 늘 같은 구도이건만 보고 있으면 아무 이유 없이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영화에 나오는 기타가마쿠라(北鎌倉) 역. 도쿄로 출근하는 아버지나 딸이 열차를 기다리는 곳. 가마쿠라 주변 정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 역의 표지판은 내게 오즈의 세계에 도착했다는 신호 중 하나다. 플랫폼에서 오즈의 사람들은 나란히 서서 열차가 달려올 방향을 같이 바라본다. 이 형식은 슬프다. 시간이 되면 열차가 오고 나뭇잎이 만춘과 만추의 계절을 맞듯 오즈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질서 있게 줄을 맞춰 어딘가에서 올 제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혹은 대만 허우샤오센(侯孝賢) 감독의 ‘연연풍진’에 나오는 시펀(十分)의 철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꼬불꼬불 길을 내며 달리는 철로는 내가 자란 부산 문현동 철길 풍경과 너무 흡사하지 않던가. 이럴 때 철로는 문득 잃어버린 삶의 시간이 된다.

수색역은 열차 기지창을 겸하고 있다. 영상자료원이 근처에 있어서 가끔 늦은 밤 수색역에서 일산행 기차를 기다릴 때가 있다. 기지창 쪽 철로는 몇 개나 될까. 넓고 큰 밤의 기지창에는 텅 빈 열차들이 띄엄띄엄 멈추어 서 있다. 불을 반쯤 밝힌 객차도 보인다. 두 량 정도의 짧은 열차도 있다. 간혹 서서히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철로와 함께 열차들도 쉬고 있다. 밤 11시 반쯤인가, 능곡까지만 운행하는 열차를 탈 때도 있다. 능곡역에 내려 십여 분 문산행을 기다린다. 멀리 자유로 쪽 밤의 지평선이 불빛과 함께 누워 있다. 취한 내 눈에도 무언가가 점멸한다.

김우창 선생님의 강연 동영상에서 ‘성스러움의 유보’(하이데거)라는 말을 들었다. 성스러움은 스스로를 아낀다는 의미라고. 꼭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 아래에서가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를 넘어서는 어떤 시간, 공간, 지평의 느낌 앞에 설 때가 있다. ‘유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 느낌만을 희미하게 감지할 뿐 그것에 다가갈 수도, 그것을 소유할 수도 없을 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향에는 신의 부재를 오래 견디고 기다리는, ‘긴 참을성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철로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에도 조그만 공간, 길이 열리는 듯하다. 그 길은 그 기다림의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

지난여름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향하다 기차를 잘못 탄 걸 알고 내린 자그마한 역.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추웠다. 작은 플랫폼에는 비를 가릴 곳도 없었다. 건너편 역사에서 역무원이 우리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외쳤다. “프레도 프레도.”(이게 “춥지 않냐?”는 뜻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역 주변은 퇴락한 공장지대였다. 우리가 달려갈 철로 저쪽으로 베수비오 산이 보였다. 번성하던 고대의 한 도시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던 산이 구름 속으로 솟아 있었다. 비바람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낯선 땅 작은 역사(驛舍)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오래된 풍경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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