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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ㆍ26… 37년을 넘나든 최태민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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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ㆍ26… 37년을 넘나든 최태민의 그림자

입력
2016.10.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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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당시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당시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37년 전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된 날이다. 이른바 ‘10ㆍ26 사건’이다. 김재규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긴 힘들다. 그 해 10월 16일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처리문제를 두고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의 강경 진압 노선이 채택되자 그와 대립하던 김재규가 진퇴 위기에 몰려 살해했다는 게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마항쟁 처리문제가 방아쇠를 당긴 결정적 계기가 됐을진 몰라도,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여기에 최근 국정농단의 주인공으로 꼽히는 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씨가 등장한다. 10ㆍ26 사건에 대한 군법재판에서 김재규가 제출한 항소 이유 보충서(항소 이유서는 1980년 1월 21일 제출했으며, 보충서는 일주일 뒤인 28일 추가로 제출했다)에는 “10ㆍ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꼭 밝혀둘 필요가 있다”며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태민과 명예총재 박근혜 이야기를 적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 가운데는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 가운데는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는 왜 최태민을 알아야 하나

대통령이 연설문은 물론이고 각종 회의에서 모두 발언한 내용, 심지어 정부에서 작성한 민감한 외교ㆍ정책 문서들까지 고스란히 최순실에게 전달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이 사적 친분에 기대 국가의 중대 정보를 일반인에게 사전에 검토 받을 수 있나’란 의문이 커지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진출하기 훨씬 전부터 최태민 최순실 모녀와 어떤 관계를 형성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이란 지위를 망각하고 이전부터 해왔던 습관을 지속했을 정도로 판단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의존적인 관계가 장기간 무의식적으로 반복돼 온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13일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김재규(왼쪽에서 두 번째).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9년 12월 13일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김재규(왼쪽에서 두 번째).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재규는 ‘10ㆍ26 혁명의 동기의 보충’이라는 제목의 단락 중 첫 번째로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큰영애의 문제’를 제기하며,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 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 각구 합동발단식 및 불우 노인, 의부모맺기결연식이 1977년 2월 25일 오후 2시 류관순기념관에서 명예총재 박근혜양, 최태민총재, 여성봉사단원등 3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국여성봉사단 각구 합동발단식 및 불우 노인, 의부모맺기결연식이 1977년 2월 25일 오후 2시 류관순기념관에서 명예총재 박근혜양, 최태민총재, 여성봉사단원등 3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태민 사망 전까지 의지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숨진 이후 “꿈에 육 여사가 나타나 돌봐주라고 했다”는 편지를 보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최씨는 일제 시대와 해방 이후 경찰로 일하다가 불교, 천주교 등 각종 종교를 옮겨 다니며 종교인으로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자신이 직접 종교를 만들어 교주가 되기도 했다(영생교 혹은 영세(永世)교로 알려져 있다). 최태민이 편지를 보내 당시 큰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할 당시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라는 주장도 있다.

1975년부터 최씨는 이 인연을 등에 업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김재규가 말한 부정행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2007년 신동아 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최태민 조사보고서에는 “횡령이 14건(2억2,135만6,000원), 사기가 1건(200만원), 변호사법 위반이 11건(9,420만원, 토지 14만1,330평),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2건, 융자간여 3건 등 그와 관련된 의혹은 도합 44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 1회 새마음 제전’에 참석한 당시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와 최순실 전국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장. 뉴스타파 영상 캡쳐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 1회 새마음 제전’에 참석한 당시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와 최순실 전국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장. 뉴스타파 영상 캡쳐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옆에 자신의 딸인 최순실을 보좌역으로 두게 한다. 뉴스타파 등 최근 보도에서도 알려진 것처럼 1979년 6월 열린 ‘제 1회 새마음 제전’에서 최순실은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그림자 수행비서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당시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는 27살, 최순실 전국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장은 23살이었다.

신군부가 들어서자 최태민은 강원도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그를 다시 서울로 불러들인 것도 박근혜 대통령이다. 육영재단을 통해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곧 잡음이 인다.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ㆍ지만씨가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 있는 언니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면서 공론화됐다.

94년 박근혜, “최태민이 부정축재자로 몰린 건 악선전 때문”

1994년 최태민 사망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최씨 집안과의 인연을 집요하게 붙잡는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반인 신분의 박근혜 대통령은 1994년엔 MBC 아침정보 프로그램인 ‘뉴스와이드’에 출연해 당시 박영선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최태민 총재와의 관계에 대해 “청와대 시정부터 알았으며 자신의 사회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으나 사회활동단체가 조직되면서 이를 견제하려는 반대 세력의 악선전 때문에 부정축재자로 몰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1975년을 전후로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 최순실 부녀와 ‘사적 친분’을 뛰어넘는, 일종의 인생의 반려자로서 인연을 맺고 살아온 셈이다.

2003년 한국일보가 단독으로 보도한 김재규의 옥중 수양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79년 음력 12월 11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1.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만 삼).

2. 육사의 명예제도와 지만생도

- 백광현 고검검사가 조사를 담당함(당시 6국장)

-김근수 중정제6국장이 사실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

참고. 최의민의 전화도청으로 최가 일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실(기록을 국장 소지 보관중)

*상기 내용은 혁명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가 있으나 일절 언급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일이라서. 돕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여기에 기록하고 자세한 것은 후일 백 검사와 김근수 국장이 조사결과.”

당시 김재규가 “아이들 일”이라고 치부했던, 하지만 대통령 시해의 직ㆍ간접적 계기가 됐던 그 인연은 37년이 지나 대한민국을 무기력의 격랑에 휘말리게 하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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