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실세는 존재했다.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손봐주는 비선이었음을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대국민 사과를 통해 시인했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라더니 지금 우리나라는 봉건시대도 못 되는 모양이다. 최씨의 대통령 연설문 검토, 수정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기는커녕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씨의 태블릿 PC에는 대외비 문서인 대통령 연설문, 국무회의 말씀자료뿐만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 인사 내용이 담긴 문서, 인수위 홍보조직 인선 문서 등 엄연한 국정 문서가 담겨있었다.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고 능력을 검증해 제 손으로 임명한 공식 라인을 제치고 박근혜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최씨였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사과처럼 최씨가 연설문에 대한 의견을 듣는 통로에 그치느냐는 것이다. 대외비 문서를 마치 비서실장인 양 보고받고 개입한 최씨라면 그 이상 무엇인들 못 하랴는 의심이 꼬리를 문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며 박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국ㆍ실장을 사임케 한 배후에 최씨가 있었다는 과거 언론 보도는 이제 보면 오히려 장난인 것같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인사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홍보조직 인사 내용이 담긴 문건이 버젓이 최씨 PC에서 발견되고, 대통령 공식일정 때 입을 옷을 고르는 최씨가 청와대 행정관들을 수족 부리듯 하는 장면도 폐쇄회로(CC)TV 영상으로 나왔다. 이쯤 되면 현 정권 들어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인사난맥상도 결국 일개 비선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니 최씨가 대통령이 인정한 연설문 자문역 정도의 ‘비선’일 뿐인지, 국정에 개입하고 사적으로 이득을 취한 부도덕한 ‘실세’인지가 앞으로 규명돼야 할 일이다. “청와대 문서를 외부로 유출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말한 것은 박 대통령 자신이다. 2014년 12월 최씨의 남편 정윤회씨가 청와대 비서진들과 정기 모임을 갖고 국정에 개입했다는 소위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의 발언이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의혹을 “근거 없는 루머”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번 최씨의 국정개입 의혹은 박 대통령 스스로 규정한 국기문란일뿐만 아니라 컴퓨터에 기록이 남아있고 각종 증언이 뒷받침하는, 근거가 상당한 의혹이다.
국민은 개탄하고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 가족이나 측근을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고 사리를 취한 권력형 게이트가 과거 정권에서도 없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직접 관련돼 있는데다 젊은 시절 사사로이 가까웠던 인물의 전횡이어서 특히나 당혹스럽다. 최씨는 공직에 있어본 적도 없고, 전문가라고 할 자격을 갖췄다고 보기조차 어려운 사람이다. 그저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대행 시절 의지했던 최태민 목사의 딸이고,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물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국정을 농락당했으니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이 느낀 모욕감은 어쩌란 말인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나라냐”는 자조가 그것이다.
면책특권이 있는 대통령은 형사상 소추되지는 않을 것이다. 연일 숱한 의혹이 제기되는데도 버려지는 증거물을 언론이 주워 보도하기까지 팔짱만 끼고 있던 검찰이 이 게이트를 제대로 파헤칠 것인지도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해서, 사과만으로 끝날 수는 없다. 사과조차 의혹을 키우기만 했다. 이미 국민들의 입에선 탄핵, 하야라는 말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자격이나 명분 없는 비선이 호가호위하도록 만들어 대한민국이 어렵사리 일궈낸 민주주의를 전근대 수준으로 되돌린 과오에 대해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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