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는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켜서 출세시켜야 하고, 망아지는 제주도의 목장으로 보내 길들여 일을 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주는 옛날부터 목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려 이후 사람이 사는 제주도의 해안마을을 제외한 섬 전체가 말 목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950m로 한국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의 정상 백록담에서 뛰노는 말을 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제주도의 말 사육은 탐라 왕국과 역사를 같이한다. 제주도의 시조(始祖)가 삼성혈의 구멍에서 솟아난 후 그와 결혼하는 벽랑국의 세 공주가 곡식의 씨앗과 함께 송아지와 망아지를 들여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제주에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가 탐라를 지배하면서부터이다.
원은 고려 충렬왕 2년(1276) 제주도의 옛 이름인 탐라에 몽골식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는 한편, 말 160필과 말 관리 전문가인 목호를 탐라로 보내어 기르게 했다. 이후 100여 년간 탐라의 목마장은 원나라의 직할 목장으로서, 이곳에서 생산된 말은 다시 몽골로 징발해 갔다. 당시 기마병을 주축으로 지구전을 펼치며 유럽 대륙까지 진출했던 몽골의 군사들이 탔던 말 중 상당수가 탐라에서 생산된 말인 셈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목장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다. 제주도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췄기 때문이다. 기후가 따뜻하고 풀이 무성하며,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가 없기에 산야에 방목하여 키우더라도 문제가 없다.
제주에서 말은 활용도가 매우 높은 가축임을 다양한 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농사를 지을 때 밭갈이를 하는 것도 말이고, 마차를 끄는 것 역시 말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제주에서 밭에 곡식을 뿌린 후 씨앗이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밭을 밟아주는데도 말을 이용했다. 목장에 방목 중인 말이 인가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쌓은 하잣성, 한라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상잣성 등도 있다.
하지만 말을 키워야 했던 제주도 민중들에게 목장의 말은 한이 맺힌 유산이다. 조선 인조 때 제주도로 귀양을 왔던 이건이 남긴 제주풍토기에는 소위 동색마(同色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키우던 말이 죽으면 목자가 가죽을 벗겨 관아에 바쳐야 하는데 혹 가죽에 손상이 있으면 관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일가친족들에게 배상하게 하는 등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번 목자의 임무를 맡으면 망하지 않는 집안이 없어 심지어는 친족들이 목자를 살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조랑말은 예로부터 과하마(果下馬), 즉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로 소개되는데 키가 암컷은 117㎝, 수컷은 115㎝ 정도다. 성격이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매일 32km를 22일간 행군하더라도 잘 견디며, 특히 발굽이 치밀하고 견고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전투용으로 많이 이용됐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군이 군마용으로 이용을 시도하기도 했고 1970년대 초에는 한국군이 산악전투용으로 육군 기마부대를 운영, 동부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오늘날 제주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그 중심에 말과 관련된 수많은 관광자원이 활용되고 있다. 예로부터 제주도의 비경 곳 10곳을 소개한 영주십경(瀛洲十景)에도 고수목마라 하여 숲과 더불어 뛰노는 말의 모습을 아름다움의 극치로 치고 있다. 요즘에도 오름과 어우러진 목장에서 한가로이 뛰노는 말들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제주조랑말은 혈통 및 종 보존을 위해 1986년 2월 8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해 보호되는 제주의 자원이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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