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따봉충’이라는 인터넷 신조어를 들었다. 20여년 전 한 과일음료 방송광고에 쓰이며 전국민의 입에 한번씩은 오르내리던 ‘따봉’(포르투갈어로 좋다는 뜻)의 부활이 생소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의 관심 표명이나 추천 의사를 나타내는 ‘좋아요’를 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벌레 ‘충’(蟲)이 붙었으니 당연하게도 긍정적이거나 높임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다.
뜻을 파악하고선 그럴 듯하다 생각하다가 마음 한 켠이 어두워졌다. 새로운 뉴스 유통 채널로 부상한 페이스북에 목매는 최근 한국 언론계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서다. 언론사들이 각자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대한 ‘좋아요’가 늘어나는데 힘을 기울이거나, 여러 기자가 자신의 기사가 많은 ‘좋아요’를 받기를 원하는 모습은 바로 내 자화상이기도 하다. 신문사가 구독자 수 확충에 주력하고, 방송사가 시청률에 울고 웃는 현실을 감안하면 ‘좋아요’에 대한 집착을 새삼 강하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사 등 콘텐츠의 질보다는 선정성에 기대어 ‘좋아요’ 늘리기에 나서는 언론의 행태에 면죄부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일화가 언론계에서 꽤 화제를 모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은 자신의 연봉보다 많은 원고료를 뉴욕타임스로부터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 프린스턴대학에서 뉴욕시립대학으로 옮긴 크루그먼의 추정 연봉은 22만5,000달러(약 2억6,000만원)다.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에 주 2회 칼럼을 기고한다. 1년에 104개 가량의 칼럼을 쓰고 22만5,000달러 이상을 버는 셈이니 칼럼 1회당 적어도 2,163달러(약 245만원)를 받는다 할 수 있다. 1회 당 원고료가 월등히 높지는 않으나(물론 최저치로 계산했을 때) 1년 동안 외부 인사에게 3억원 가까운 콘텐츠 생산 비용을 지급할 수 있는 언론사가 과연 한국에 있을까.
크루그먼의 원고료는 권위지라는 수식어를 오래도록 품어 온 뉴욕타임스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으로 아무리 명망 있는 교수라도 30만원 이상의 원고료를 지급할 수 없으니 적어도 법적으로 크루그먼의 사례는 한국에선 꿈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론 원고료 상한선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해서 입이 벌어질 정도의 돈을 줄 국내 언론사는 없겠지만.
20세기 한국언론은 표현의 자유에선 억압 받았으나 산업적 측면에서는 온실과도 같은 환경을 제공 받았다. 1960년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정보 수요가 급증했고, 신문 등 인쇄매체의 구독도 크게 늘었다. 60년대 초반 구독 1위 신문사가 발행부수 20만부를 밑돌았으나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발행부수 100만부를 훌쩍 넘긴 신문사가 넷인 적도 있다. 방송산업도 비슷한 궤적을 따라 급성장했다. 신문사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고, 방송사의 설립은 전파의 희소성을 이유로 더욱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통폐합까지 이뤄졌으니 살아남은 언론사들로선 경쟁자가 대거 사라져 사업 환경이 더욱 좋아진 셈이었다. 콘텐츠 경쟁력으로 독자나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기 보다, 관성에 기대 콘텐츠를 생산하며 덩치 키우기에 바빴던 한국언론의 ‘흑역사’는 유구한 셈이다.
그래도 자본력을 갖췄던 옛 언론사들의 위용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대형 포털사이트나 SNS에 디지털 유통망을 빼앗긴 채 약한 자본력으로 미래 먹거리 찾기에 골몰하는 요즘 언론사들의 처지 때문이다. 확인되지 않은 속보를 전달하는 데 바쁘거나 받아쓰기에만 여념이 없는 요즘 언론계의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는 언론사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고 이에 앞서 자본의 선순환 고리가 형성돼야 한다. 언론사가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고, 독자는 제 값에 소비하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한 크루그먼과 같은 사례는 한국에선 요원하기만 하다.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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