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먹어야 공도 잘 친다. 든든히 먹고 해.”
한국 여자 골프의 선구자인 고(故) 구옥희 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이 2005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 진출한 전미정(34ㆍ진로재팬)을 처음 만나서 던진 말은 공을 잘 치는 요령이 아닌 “밥 많이 먹고 다니라”는 격려였다. 체력이 뒷받침 돼야 공도 잘 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구 전 회장은 대선배 앞에서 고개도 못 들던 전미정의 손을 끌고 가 고기를 사주고 용돈까지 챙겨줬다. 한국 1호 여자프로골퍼 구옥희 전 회장은 1985년 첫 승을 거둔 이래 2005년까지 일본 투어에서 23승을 거둔 ‘전설’이다.
전미정이 JLPGA 투어 통산 24승을 거두며 한국 골프의 전설이자 자신의 우상인 구옥희를 넘어섰다.
전미정은 23일 일본 효고현 마스터스 골프클럽(파72ㆍ6,523야드)에서 열린 2016시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노부타 그룹 마스터즈 GC 레이디스(우승상금 2,520만엔ㆍ한화 약 2억7,700만 원) 최종 라운드에서 7언더파 65타를 쳐, 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극적인 역전 우승이었다. 선두에 4타 뒤진 채 4라운드를 시작해 우승 가능성이 크지 않았지만 전미정은 보기 없이 버디만 무려 7개를 쓸어 담아 2타를 줄이는 데 그친 류 리츠코와 스즈키 아이에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이보미(28ㆍ노부타그룹)와 안선주(29ㆍ모스버거)는 최종합계 12언더파 286타로 공동 4위에 올랐다.
이로써 전미정은 구옥희를 넘어 역대 한국인의 JLPGA 투어 최다승인 24승을 달성했다. 한국 선수의 일본 투어 다승 순위를 따져보면 전미정 뒤로 안선주가 22승, 이지희(37ㆍ진로재팬)가 21승을 거두고 있고, 이보미는 19승을 기록 중이다. 또 한국 선수들은 올해 열린 JLPGA투어 32개 대회에서 14승째를 합작했다.
전미정은 아마추어 우승 경력이 없다. 인라인스케이트 선수를 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고교 진학 이후 골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회 입상은커녕 90~100개 스코어가 태반이었다. 골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만 생각하는 승부욕으로 남들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스무 살이던 2002년 KLPGA 정규투어에 입문했다. 전미정이 처음으로 골프에 ‘맛’을 들인 건 첫 우승을 거두고 나서부터였다. 전미정은 데뷔 첫 해 신세계배 KLPGA 선수권 대회에서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3년에는 18홀 최소타 기록(61타)를 작성하며 데뷔 2승을 거두는 등 승승장구했다.
국내에서 2승을 거둔 전미정은 2005년 일본 퀄리파잉(Q) 스쿨을 통해 JLPGA투어에 진출했다. 그는 2006년 3승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매년 1회 이상 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2014년 5월 아이언 샷 도중 나무뿌리를 치면서 오른손목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후 전미정은 지난해까지 우승을 추가하지 못했다. 부상은 사라졌지만 좀처럼 예전 샷 감을 찾지 못했다.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만류에 전미정은 “다시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필드로 돌아갔다. 지난 7월 사만사 타바사 걸스 컬렉션 레이디스 토너먼트에서 3년여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구옥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 뒤 이번에 시즌 2승을 거두며 개인통산 24승째를 일궈냈다.
김기중 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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