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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우리가 버린 무더위, 고용 안정

입력
2016.10.2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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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선배에게 요즈음 체력이 약해지고 눈도 이따금씩 침침하다는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선배는 ‘올해 무더위가 지겹다고 여름 지나기만 바랐지, 그것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라고 대꾸했다. 네가 당장의 무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빨리 지나가라고 한 세월이 네 몸도 그렇게 만들었으니 순리대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다. 시간이 가면 몸이 노쇠하듯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10월 초순 각 언론사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해 우리나라 이공계 박사의 해외 유출이 심각하다고 알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는 10점 만점에 3.98점으로, 조사 대상 61개 국가 중에서 44위라고 한다(지수와 순위가 낮을수록 유출 빈도가 높다는 의미다). 굳이 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해외 취업에 과거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소식은 최근 들어 자주 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국내 연구직 신규 일자리가 비정규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일자리마저 기초과학 연구자에 대해서는 많지 않으며, 근무 환경도 지나치게 단기 실적을 중시한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자연ㆍ공학 계통 대학의 상황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전국의 의예과가 거의 모든 최상위권 고교 졸업생으로 채워진 다음에야 공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이 충원되고, 그렇게 충원된 학생들마저도 약학과로 편입하기 위해 중도에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고용이 불안정한 연구직보다는 그래도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전문직으로 일하기를 학부모와 학생 모두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청년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자 대학에서도 시험을 준비한다. 즉, 자연ㆍ공학 계열 연구와 학문의 황폐화는 일자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많은 아이들의 꿈은 과학자였다.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 화학ㆍ기계공학과 등은 가장 우수한 수험생들이 선택하는 전공이었다. 해외 유학을 마친 이공계 박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학자 또는 연구직으로 일하며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1980~90년대 우리 사회에서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기업은 당장의 이익과 무관한 연구직들을 가장 먼저 기업 밖으로 축출했다. 그나마 경영 상황이 괜찮은 기업에 속한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않은 연구직들은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취급되어 버려졌다. 국가는 고용안정성을 버리고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며 고용유연성을 신격화했다. 더 많은 소득을 향한 탐욕은 물질적 부(富)뿐만 아니라 윤리적 정당성까지 획득했다. 반면에 근로자는 시장의 냉혹함에 보호장치 없이 노출되고 자신의 비참한 삶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받았다.

이런 현실에서 이공계 박사들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벗어나 해외 취업을 선택하고, 청년들이 의예과와 약학과를 선호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 선택이다. 불안정 고용이 주는 비참한 삶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중산층 부모들이 자녀에게 그런 선택을 권유하고, 그들의 적성이나 호기심과 상관없이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당장의 이익을 쫓아 과거의 가치와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버렸을 때, 우리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시 현재의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운 가치 기준을 준비해야만 지금과 다른 미래가 우리에게 올 수 있다. 모든 걸 얻어야 한다는 탐욕을 버릴 때, 제4차 산업혁명을 대비할 과학 인재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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