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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알아서 기는 나라에 복지는 없다

입력
2016.10.2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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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보육대란 당시 유치원 선생님 등 관계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란 거창한 이름의 복지정책을 내걸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해 초 보육대란 당시 유치원 선생님 등 관계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란 거창한 이름의 복지정책을 내걸었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

이상이, 박은선 지음

밈 발행ㆍ612쪽ㆍ2만원

출산, 육아에 힘들고 지친 이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게 스웨덴 복지모델이다. 하지만 스웨덴이라 해서 그 땅에 무슨 특별한 먹을거리가 나거나 호흡하는 공기에 특별한 성분이 뒤섞여 있어서 그걸 먹고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엘프 요정으로 변신하는 게 아니다. 사람 사는 곳, 얼추 비슷하다. 관건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 해결 과정이다.

1920, 30년대 스웨덴도 인구절벽에 부딪혔다. 안 그래도 경제가 엉망이었는데 미국 대공황 여파까지 몰아치자 출산율은 더 떨어졌고, 먹고 살기 힘들다며 미국, 유럽으로 이민을 나갔다. 지금도 인구 1,00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나라이다 보니, 그 당시 위기감은 더 했다. 가만 앉아서 나라가 사라질 판이었다. 내년부터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서는 인구절벽에 맞닥뜨리게 된다고 걱정하는 한국보다 그 당시의 스웨덴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분분한 논의가 일었다. 당연하게도 그 때 스웨덴에서도 “애 안 낳으려 드는 여자들이 문제”라는 발언들이 속출했고, 혼자 살거나 애 안 낳는 여성들에게 징벌적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줄이었다. “인구가 줄면 노동력이 줄어서 임금이 올라갈 것이니까 무조건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식의, 일견 쿨하고 멋지게 보이는 좌파식 논리가 그 때라고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분위기를 뒤집은 게, 나중에 각기 다른 이유로 노벨상을 받는 군나르 뮈르달, 알바 뮈르달 부부의 ‘인구 문제의 위기’라는 논문이었다. 인구절벽은 여자만 닦달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니 내 집 마련, 출산ㆍ육아에 따른 비용, 여성들의 경력관리 등에 대한 해결책을 패키지로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파는 민족국가를 유지할 수 있어서 좋고, 좌파는 든든한 복지를 얻으니 좋다.

더구나 스웨덴 복지국가가 내세운 건 ‘평등’이 아니라 ‘자유’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라는 전두환 시절 노래의 가사가 실제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그 자유 말이다. 원하는,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뒷받침을 국가가,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복지국가 사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좌파=평등과 복지’ ‘우파=자유와 성장’이라는 확고부동한 이분법 공식이 대체 왜 생겼는지 의문이다. 당장 뮈르달 부부의 제안과 그에 기반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민족국가를 옹호하고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는 우파적 기획인가.

잘 모르거나, 겁에 질렸을 때 무지막지하지만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나눠보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명백한 피아 구분은 생존율을 높여줄 뿐 아니라 인지적 편안함까지 선물해준다. 20세기 한국 현대사는 그 증거다. 복지의 ‘ㅂ’자만 나왔다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일순간 게을러지기로 작정함으로써 나라 경제를 파탄낼 것처럼 떠들어대는 이들이 아직도, 여전히 많은 이유다.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는 이 강고한 이분법을 깨기 위해 분투하는 책이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복지는 자유를 증진시키며, 성장에도 이바지한다’는 얘기다. 책은 이상이 제주의대 교수와 사회과 교사 출신으로 법을 공부 중인 박은선씨가 함께 썼다. ‘복지국가 전도사’를 자임하는 이 교수가 시민단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만든 게 2007년이니 10년간의 토론, 강연 등의 경험이 녹아 있고 박씨가 조금 더 입문교양서 수준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처참한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도로시아 랭의 '이주자 어머니' 연작 가운데 하나. 지금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을 복지천국으로만 기억하지만, 1920, 30년대엔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대량 이주한 불행한 나라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처참한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도로시아 랭의 '이주자 어머니' 연작 가운데 하나. 지금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을 복지천국으로만 기억하지만, 1920, 30년대엔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대량 이주한 불행한 나라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실 복지야말로 좌파보다는 우파의 어젠다에 가깝다는 얘기들은 차고도 넘친다. 독일의 복지는 군국주의자 비스마르크가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계급통합 전략의 일종으로 구사된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 복지는 선진적이지만, 노조와 남성 위주라는 단점이 있다. 저출산 문제가 불거지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보완책이 마련되고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유명한 영국의 복지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의외로 복음주의 우파 세력이다. 20세기초 영국 노동당 의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봤더니 복지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라 열렬한 복음주의자 존 러스킨이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특히 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영국 감리교의 헌신은 너무나 유명하다.

선진국 가운데 복지가 가장 후진적이라는 미국도 실은 2차 대전 직후 전면적인 복지를 하려 했다. 그러나 강고한 인종차별 때문에 좌절됐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복지 정책을 한 단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 ‘힐러리 클린턴을 좌경화시키겠다’던 버니 샌더스의 공언은 이런 맥락 아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되묻는다. 정말 복지 과잉 때문에 경제가 망하는 것이라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망해야 할 것은 스웨덴이며, 그 다음엔 독일, 프랑스 같은 복지국가들”이어야 하고 미국은 복지정책을 내다버려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경제와 복지는 하나며 경제가 잘 되면 복지가 잘 되고, 복지가 잘 되면 경제가 된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600쪽에 달하는 이 책엔 이런 내용들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다.

남는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다. 기득권을 쥔 쪽에서 알아서 양보해줄 리는 없다. ‘박근혜표 복지’는 역시나 맹탕이었고, 그나마 경제부총리직에 필적할 사회부총리직을 신설해 복지정책에 힘을 실어주자는 주장은 한국적 변용(?)을 거쳐 결국 교육장관의 몫이 되면서 ‘큰 정부’가 그렇게 싫다는 우파 정부가 직제표에서 부총리직 하나 더 늘리는 것으로 끝났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비례대표 강화를 통한 다당제, 그리고 다당제 하 여러 정치연합간 이합집산을 통한 ‘포용적 정치’다. 이래야 복지 욕구가 정치적으로 반영되리라 생각해서다. 이미 지난해에 중앙선관위도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본 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하면서 이것이 “지역주의 완화, 유권자 의사 반영, 정당정치 활성화”에 도움된다고 밝힌 바 있다.

대중적 입문서를 지향했음에도 정책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책의 성격상 다소 딱딱할 수 밖에 없는 서술은 안타깝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저자들도 결론부에 정치개혁 문제를 다룰 수 밖에 없듯 결국 이건 논리 싸움이라기보다 파워 게임이라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복지정책은 국가가 인민을 국민으로 호명, 동원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을 때 강력히 작동했다. 알아서 기어주는 국민들에겐, 이 기나긴 얘기가 대체 무슨 소용이겠나.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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