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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토록 간사하고 얄팍한 마음이라

입력
2016.10.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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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람들에게 10월은 여러모로 분주한 달이다. 책 판매량이 가장 많은 겨울철에 승부 걸 만한 책을 내기 위해서는 이때쯤 원고 매무새 다듬는 작업이 끝나야 한다. 1,000매 넘는 원고가 하나의 주제 아래 꿰어져 다양한 관점과 이야기, 재미와 의미까지 담도록 매만지는 작업은 적잖은 집중과 긴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눈앞의 원고에만 몰입할 수 있는 편집자는 거의 없다. 전 세계 70여 개 국제도서전 중 가장 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10월 중순에 열리기 때문이다. 100여 개국 출판인과 서점인, 중개상들이 한데 모여 도서 판권을 사고파는 이 축제를 전후해 출판사 편집자에게는 에이전트들이 보내는 라이츠 가이드(Rights Guide)가 쏟아져 들어온다. 해외로 판권을 팔기 위해 전 세계 주요 출판사들이 제작한 신간 도서 소개 자료인 셈이다. 매일 수십 개씩 이메일 함을 채우는 이 두툼한 책자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각국 출판계가 이 시기에 맞춰 탐나는 신간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편집자들은 빠듯한 시간을 쪼개 자료를 검토하고 좋은 책을 선점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른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나는 우리 회사가 선호하는 소재를 많이 다루거나 대중의 관심사를 발 빠르게 수용하는 곳의 자료만 다운받아 따로 묶어둔다. 시간 날 때 한꺼번에 일별하면서 전체 원고를 받아 상세 검토에 들어갈 책들을 골라내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도 한 해 열 권 내외 책을 내는 소규모 출판사에서 이 시기에 소개되는 해외 도서의 판권을 사봤자 고작 서너 권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쟁이 치열한 유명작가의 신작은 애당초 넘보지도 못할 처지니 딱히 서두를 까닭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료를 살피고 원고 받아 상세 검토까지 들어가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러 나라 출판사가 소개하는 신작들을 한 자리에서 살펴보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어젠다, 새롭게 떠오르는 문화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다는 효용가치가 제법 크기 때문이다.

올겨울 출간할 두 권의 원고 구성작업을 지난주 화요일에야 끝냈다. 이제 몇 차례의 교정과 표지작업만 마무리하면 될 터. 느긋한 기분으로 라이츠 가이드 폴더를 열었다. 웬걸,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독일, 덴마크, 미국…, 서너 개 출판사의 자료를 살피다 보니 지금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테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행복’과 ‘죽음’의 문제를 일상적 차원에서 이야기한 신작을 전면에 내세웠다.

부랴부랴 원고를 요청해 검토에 들어갔다. 좌표 잃은 행복의 근원을 재탐색하면서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해가는 사람들의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웰비잉(well-being)을 지나 웰다잉(Well-dying)을 고민하는 그들의 촘촘한 시선은 현실에 견고하게 잇닿아 있었다. 짧은 분량의 원고 두 개를 검토하는 내내 부러운 한편으로 충일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런 책을 내고 싶어 내가 편집자로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자부심마저 몰려왔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판권 구매 요청서를 제출했다. 한나절 만에 답장이 왔다. ‘매우 아쉽지만’ 두 권 다, 지난 주말 다른 출판사에서 제법 높은 가격으로 판권을 구매했다는 메일이었다. 그 며칠 나를 감싸던 충일한 행복감이 구멍 난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바보같이 나 혼자 뒷북 울리고 있었던 거구나. 속상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덜컥 몸살까지 걸려버렸다. 그사이 조판을 마친 교정지가 책상 위에 살포시 놓여 다음 작업을 기다리는데, 약에 취한 나는 휘청거리며 주말을 맞는다. 꼭 일주일 전 내가 그토록 감탄해 마지않던 행복의 길은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다만 절감하는 건 지금의 내 상황이 행복의 디테일과 아득하게 멀다는 냉랭한 인식뿐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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