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벨라루스의 언론인이자 르포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2015년 노벨문학상을 준데 이어, 올해는 미국 가수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때문에 2년 연속 파격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뒷공론이 무성하다. 스웨덴 한림원이 앞으로 어떤 기발한 선택을 계속할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이 지면에서는, 노벨문학상의 파격 행보가 ‘2년 연속’ 이루어졌다는 세평에 간략한 이의를 제기해 놓고자 한다.
작년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녀의 작품이 ‘논픽션’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 기회에 한국 독자들이 외면하고 있는 논픽션을 부양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녀의 작품을 논픽션으로 규정하는 일방적인 여론을 거들었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은 전쟁(‘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체르노빌의 목소리’), 구소련에서의 삶(‘세컨드핸드 타임’)이라는 하나의 기획된 주제 아래, 보통 100여 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인터뷰이의 육성이 나열되어 있다. 기록을 우위에 두는 이런 방식은 허구를 조작하는 문학의 속성에 반한다.
하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작품을 논픽션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녀는 인터뷰이의 육성을 집적하고 편집한 자신의 작품을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데, 이 형식에는 논픽션에서 직접 발원하지 않은 두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그녀를 매료시켰던 도스토옙스키의 다성성(多聲性)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나의 스승”이라고 불렀던 벨라루스 출신 작가 미하일로비치 아다모비치(1927~94)가 원형을 제시한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다. 누보로망이 20세기 소설을 갱신하려던 프랑스 작가들의 고민에서 나온 것처럼, ‘목소리 소설’ 또는 ‘소설-코러스’ 역시 현대 소설을 갱신하려는 벨라루스 작가들의 문학 실험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소설 문학을 확장하려는 시도에 노벨문학상이 돌아갔으므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은 ‘노벨문학상, 2년 연속 파행’에 해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노랫말에 주어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원래 노래와 시가 하나였다는 음유시인의 전통을 내세우지만, 중세 이후 시와 노래가 이혼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런 뜻에서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은 꽤 시대착오적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경우 문학을 확장했다는 공로가 있지만, 밥 딜런의 경우는 노벨문학상을 대중 가수에게 활짝 열어젖히는 나쁜 전례 말고는 아무것도 문학계에 보탤 것이 없다.
손광수의 ‘음유시인 밥 딜런 - 사랑과 저항의 노래 가사’(한걸음더, 2015)는 영문학을 전공한 지은이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지은이는 밥 딜런의 노랫말을 시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밥 딜런의 “노래 가사는 그저 종이 위에 쓰인 것이 아니다”라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한다. 예컨대 밥 딜런의 대표곡 ‘구르는 돌멩이처럼(Like a Rolling Stone)’은 인쇄된 가사를 눈으로 읽을 때와 노래로 들을 때 뜻이 달라진다. 가사는 한때 호시절을 누리다가 노숙자로 전락한 명문가 여성에 대한 조롱으로 일관되어 있지만, 거기에 밥 딜런의 내지르며 외치는 목소리가 입혀지는 순간, 전락이라는 혹독한 시련이야말로 해방과 자유의 전제라는 역설로 탈바꿈한다. 밥 딜런은 공연 예술가이며, 그의 노랫말은 가창을 통해 온전한 메시지가 된다. 이런 특성을 헤아리지 못하면, “왜 가사는 문학이 아니라는 거야?”라는 멍청한 질문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 특성을 분간하는 것은 결코 ‘시는 고급, 가사는 저급’이라는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음유시인 밥 딜런’을 다 읽고 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보탤 궁극의 의문이 저절로 솟아난다. 밥 딜런에게 저 상을 주어야 할 문학적 성취가 대체 뭐야. 음유시인이라면 이미 타계한 미국의 앨런 긴즈버그, 구소련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비롯해, 현재도 활동 중인 독일의 볼프 비어만 같은 뛰어난 인물이 없지 않았는데 말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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