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마법이며 동시에 훌륭한 해결책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시한 건 ‘통풍’이었다 했다. 통풍은 간격을 전제로 한다. 이 간격을 틈타 솔솔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과도한 욕심, 쓰라린 기억을 잘 말려주는 역할을 한다.
내 마음 속 음습함을 없애고자 할 때, 강렬한 햇볕보다 차라리 이런 방법이 나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심지어 이런 결과도 낳는다.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해서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가 쓴 이 책 제목은 ‘약간의 거리를 둔다’로 정해졌다. 척지는 거리가 아니라 약간의 거리다. 어디로부터 거리냐면 칭찬, 노력, 애씀 등으로부터의 거리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 날뛰지 않아도 대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힘껏 밟고 서 있기만 해도 편안하다. 자연스러움은 정신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은 노력에 의해 타고난 가능성이 확대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하면 된다’고 말하는 속내에는 건방진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자기 행위를 타인에게 평가 받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은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내고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표지를 다시 보면, 수영복을 입은 채 우아하게 걸어가는 여성이 달리 보인다. 걸어가는 포즈 못지 않게 중요한 건 표정이다. 이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정신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만끽하는 표정. 세상이 왜 이러냐, 애써 한탄할 필요는 없다. “정의는 행해지지 않고, 약육강식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권력과 금전에 수시로 유혹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에 저항하고자 보다 인간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의 불안을 휘발시켜주고자 하는 자기계발서, 심리학책, 에세이들은 넘쳐난다. 신조어를 남발하면서 발빠른 트렌트 캐칭 능력을 과시한다든가, 네가 똑바로 선다면 세상이 달리 보일 거라는 원론의 무한반복이라거나, 이런 저런 얘기 주절주절 끝없이 이어가는 문학소년ㆍ소녀스러운 글들이다. 그 가운데서 이 책은 오직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의 포즈, ‘약간의 거리를 둔다’일 뿐이라고 일러준다. 독자와도 약간의 거리를 설정해둔 이 절제 덕에 문장 사이에서도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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