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돼지고기 음식을 만들어 왔다. 특히 마을 잔치를 준비하는 경우 돼지를 한 마리 잡아 살코기는 굽거나 쪄서 음식을 만들고 남은 뼈는 푹 고아서 육수를 만들어 산과 바다에서 채취한 나물이나 채소와 함께 국을 끓여 나눠 먹었다고 한다.
봄에 한라산에서 채취해 말려 보관했던 고사리를 곱게 으깨서 결대로 찢은 고기와 양념을 한 뒤 육수와 한 소금 끓여내는 고사리 육개장과 겨울에 채취한 몸(모자반)을 진한 육수에 끓여내어 고기와 해초의 묘한 균형을 이루어 내는 몸국은 이미 육지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 국수를 말아 돼지고기 수육을 얹으면 전형적인 고기국수가 된다. 고기국수는 제주 향토 음식을 대표하게 되어서인지 찾는 이도 많고 취급하는 식당 역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요즈음 들어 관심을 끌기 시작하는 제주 흑돼지를 이용한 국물 음식은 ‘접짝뼈국’이다. 정확한 부위나 명칭이 일정하지 않아 목 뒷부분, 앞다리 부분, 등뼈 부분이라고 식당마다 다르게 이야기하는데 육지의 뼈다귀 해장국처럼 살점이 붙은 돼지 뼈의 살을 스르르 분리되어 부드러워 질 때까지 푹 고아서 품질 좋은 제주 무와 곁들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설렁탕이나 곰탕처럼 고춧가루 양념이 없는 든든하고 뽀얀 국물인데 메밀 가루를 풀어 뭉굴뭉굴 걸쭉하게 해서 먹는다. 식당에 따라 얼갈이 배추나 청양고추를 넣기도 하며 요즈음에는 두부나 부추를 넣어 주는 식당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된장을 풀은 호박잎 국에도 밀가루나 콩가루를 넣어 국물을 걸쭉하게 하는데 접짝뼈국은 일반적으로 제주 메밀을 넣어 메밀의 담백하고 깊은 맛이 돼지 국물을 은은하게 한다. 메밀이 비싸서인지 밀가루로 농도를 맞추는 식당도 있는데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골라 먹으면 될 것 같다. 제주시 삼양동의 한 식당은 밀가루를 선호하며 서귀포시 서홍동의 한 식당은 메밀 가루만 고집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전분 성분이 없이 내어주는 식당도 있기는 하다. 맵지 않아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보양식이다. 제주도에서도 사라져 가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음식이니 제주 여행때 일부러 찾아 맛을 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접짝뼈국이 잊혀져 가는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멀어지는 것도 아쉽지만 품질 좋은 제주 메밀을 활용한 음식이 발달 되지 않은 부분도 다소 의아하다. 봉평을 비롯한 강원도 메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메밀은 아마도 메뉴 개발 부분이나 상품화에 애를 먹고 있는 것 같다. 매년 봄이면 성읍리 일원에서 메밀 축제가 열리는데 성읍에 사는 지인 조차도 행사를 모르고 있을 정도이다. 국이나 빙떡 이 외에 여타 지역처럼 메밀로 국수를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귀포 시내에도 냉면이나 막국수를 취급하는 식당은 밀면을 파는 식당보다 수가 적다.
서귀포의 작은 마을이지만 걸쭉한 순대국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한 가시리도 가을 억새로 유명한 따라비 오름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여행객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재래 시장 먹거리 중 일반적인 족발과 달리 돼지 발목 아래 부분부터 발가락이 있는 부위로 만드는 아강발도 별미이다. 육지에서는 ‘미니 족발’이라고도 부르는데 뼈를 발려먹기 다소 귀찮기는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음식이다. 쫀득한 젤라틴 성분이 많아 피부 미용이나 노화 방지에도 좋다.
향토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면 많이 내어 주는 음식이 돔베 고기인데 된장을 풀은 육수에 부드럽게 삶아 돔베(도마의 제주 말)에 올려 주는 음식으로 오겹살을 주기도 하지만 저렴한 식당에서는 전지(앞 다리 살)를 잘 삶아 썰어 준다.
돼지고기 구이는 ‘근고기’가 가장 제주스럽다. 특정 부위를 지칭하지 않고 ‘근’ 단위(대략 600g)로 고기를 판매했다고 해서 유래된 말인데 두께가 4~5Cm 되는 두꺼운 고기를 구워 먹는다. 생고기를 그대로 불 판에 올려 구워 먹기도 하지만 숯불에 초벌을 한 다음 먹기 좋게 가위로 썰어 굽는 것이 훈제된 향도 좋고 시간도 절약된다. 근고기 구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스는 멜젓(멸치젓)인데 고기 구울 때 약간의 소주를 넣어 불 위에 올려 고기를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제는 제주도에서 돼지 고기 구이의 필수 소스로 자리매김하여 멜젓이 없으면 허전한 마음까지 생길 정도이다. 멜젓 대신 자리젓을 곱게 갈아 제공하는 식당도 있다.
삼국 시대부터 오랫동안 거센 환경과 풍토를 이겨내며 제주의 삶과 함께한 제주 흑돼지는 여러모로 문화적 가치가 큰 재래의 고유 가축임에는 틀림이 없다. 옛날에는 ‘도감’이라고 해서 잔치 때 고기만 썰어 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돼지고기는 잔치에 매우 중요한 재료였다. 도감이 썰어 주는 고기가 훨씬 맛있다고 했고 도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담배나 음료수를 건네 주기도 했는데 그래야 좋은 고기를 얻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알뜰하고 소박한 제주의 식문화에 깊이 뿌리 내린 흑돼지가 제주의 상징으로 꾸준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 본다.
이재천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 총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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