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소녀 성폭행 살해가 발단
“남성 우위 용납 안돼” 여성 파업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전역에 “우리는 살고 싶다”는 절규와 검은 물결이 파도쳤다. 성폭력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은 이날 거리로 몰려 나와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들과 무능력한 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BBC방송은 이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최소 수천 명의 여성들이 참여해 광장 곳곳을 메웠다”며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실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시위대는 ‘당신(남성)이 우리를 만지면 우리 모두가 대응할 것’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더 이상 여성을 향한 남성 우위의 어떠한 폭력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은 수요일’로 명명된 이날 시위는 이달 초 발생한 끔찍한 성폭력 사건에서 시작됐다. 아르헨티나 해안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16세 소녀 루시아 페레스가 강제로 마약을 투약 당한 뒤 남성 2명에 잔인하게 성폭행 당하고 살해된 사건이다. 페레스의 어머니인 마르타는 현지언론에 “딸을 향해 벌인 범인들의 잔혹행위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슬픔을 토로했다. 아르헨티나 여성단체 카사 델 엔쿠엔트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난 7년 동안 성폭력 등과 관련한 사건으로 여성 1,808명이 살해당했다. BBC는 “아르헨티나에서는 평균 36시간마다 여성 1명이 남성에게 살해 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페레스 사건으로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여성단체는 이날 오후 1시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업무를 중단하는 파업을 벌이는 것으로 시위에 동참했다. 페레스의 오빠인 마티아스 페레스(19)는 시위 하루 전인 18일 페이스북에 “이번에는 제 동생이 살해됐지만 다음 번에는 당신 차례일지 모른다”며 “수천 명의 페레스가 나타나는 걸 막을 유일한 방법은 우리 모두가 거리로 나와 ‘한 명도 잃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 뿐”이라고 적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07년 말 집권한 여성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2012년 ‘페미사이드’(여성살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시위에 나온 한 여성은 “무능력한 정부에 아무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며 “이번 시위가 남성 우월주의적인 아르헨티나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현 대통령은 여성들의 분노가 거세지자 성범죄 남성에 대한 전자태그 부착, 여성 피난처 설립 확대 등을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