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강부회의 우려가 있다지만 그래도 역사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는 ‘묘한 기시감’이다. 20일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문화융성’에서 발표되는 정재훈 경북대 교수의 논문 ‘영조의 리더십: 탕평책과 문화융성’이 그렇다. 대회 제목엔 ‘창조’와 ‘문화융성’이 들어있고, 발표 논문들의 소재는 세종과 정조, 드라마 ‘대장금’ ‘동이’ ‘허준’ 그리고 영화 ‘명량’ 등이다. 이쯤이면 대회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정 교수의 논문은 일단 영조를 주목대상으로 꼽았다는 점에서 튄다. 사도세자의 비극, 개혁군주 정조가 추어 올려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영조는 ‘매정하고 노회한 정치꾼’으로만 비춰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작품 가운데 결코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인 조선 백자 가운데서도 달항아리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인데 이게 영조시대 작품이란 점을 부각한다. 또 영조 스스로가 글씨, 그림, 도자기 등 다방면에 관심이 깊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조대의 문예부흥이 정조대 못지 않았을뿐더러 정조대를 예비한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영조대 문예 부흥의 원동력은 다른 측면도 있다. 정 교수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꼽는다. 알려졌다시피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으나 ‘경종독살설’ 때문에 출범 초기부터 정권의 정통성에 적잖은 상처가 있었다. 때문에 탕평책은 영조가 대단한 성군이어서 실시한 게 아니라 “나라와 신민 전체를 대표해야 하는 국왕이 한 쪽 당파만의 지지를 받는 상황이 지속”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측면도 있다. 스스로 국왕이라 일컫는 자가 자기 몸을 당쟁의 한가운데에다 던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영조의 탕평책은 오직 그만의 것이라기보다는 “반(反)탕평파와의 끊임없는 긴장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균역법 역시 “1년 동안 관료, 유생, 군사, 일반 백성 등 여러 계층의 의견을 듣”는 방식으로 도입됐다. 세종 이후 처음 시행된, 일종의 여론조사였던 셈이다. 정 교수는 균역법 자체는 한계가 있었을지 몰라도 이렇게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이 크게 주효했다고 봤다. 숙종 때 양란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 극복됐다면, 영조 때는 그 토대 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한마디로 영조의 포용적인 리더십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이것이 영조시대 문화융성의 근간이었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창조’와 ‘문화융성’을 내걸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전화로 연결된 정 교수는 “진정으로 문화융성을 하려면 그 때만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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