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혼자 먹는 밥)이 유행이다. 편의점이나 학생식당 구석에서 등 돌리고 먹던 혼밥이 횟집으로 고깃집으로 속속 진출하고 있다. 바야흐로 드라마 주인공의 청승맞은 혼술조차 부러움과 모방의 대상으로 승화해내는 시대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한 혼밥족의 밥상에서 외로움과 단절의 그림자를 걷어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혼밥을 ‘즐긴다’ 는 표현도 아직은 허세로 들린다.
꽤 오랜 시간 혼밥의 주인공 역할은 혼자 밥을 지어 먹으며 생활하는 자취생(自炊生)의 몫이었다. 세상 처량한 이들의 혼밥은 취업난, 생활고와 맞물리며 아직도 진행형이다. ‘눈치 볼 필요 없고 방해받지 않으며 먹고 싶은 음식 먹을 수 있다’는 혼밥 예찬에도 시간과 돈, 자격지심에 치인 청춘의 설움이 숨어 있다. 대학생 취준생 직장인 등 25명의 젊은 자취생이 보내온 사진과 사연을 바탕으로 혼밥의 유형을 나누어 보았다. 세상의 쓴맛 단맛 오묘한 맛에 대한 청춘의 담담한 리뷰가 각각의 혼밥 일기에 담겨 있다.
#1 환승 혼밥 / 배고프니 그냥 맛있다 ㅠ.ㅠ
오늘도 알바 가는 길 위에서 저녁을 때웠다. 꼬마김밥을 사서 지하철 환승할 때 반 먹고 나머지 반은 가방에 넣었다가 버스로 갈아탈 때 먹어 치웠다. 스터디랑 알바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조정하고 싶어도 내 맘대로 안 된다. 그나마 오늘은 미친 듯이 달린 덕분에 굶지 않았지만 어젠 밤 11시까지 쫄쫄… ㅠㅠ. 처음 환승통로에서 밥 먹을 땐 왠지 창피했는데 이젠 그런 느낌도 없다. 배고프니 그냥 맛있다. 차 탈 때마다 빨리 환승해서 남은 것까지 마저 먹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개(엄청)처량하네.. ㅎㅎ - 취준생 박모(28ㆍ여)씨
#2 돈 없어 서러운 혼밥 / 모임 불참, 라면 후루룩~
저녁 모임을 빠졌다. 친구들한텐 “알바 끝나고 연락할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라고 했다. 그러면 애들끼리 먼저 먹을 줄 알았다. 근데 알바 끝날 시간까지 밥을 안 먹고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도 난 ‘당황하지 않고’갑자기 야근해야 한다며 푸념질 했다. 그리곤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었다. 약간 서럽지만 어쩔 수 없다. 모임 한 번 가면 ‘N분의 1’로 계산해도 밥 술 커피값까지 2만~3만원은 기본이다. 당장 이번 주말 친구 결혼식에 축의금도 내야 하고… 이번 달에는 약속이 더 늘면 안 된다. 절대! - 취준생 박모(25ㆍ여)씨
#3 프라이팬 삼시세끼 / 볶음밥 등 입맛대로 척척
약속 없는 일요일은 찬밥 처분하는 날이다. 아침에 엄마가 보내준 김치로 김치볶음밥을 해 먹고 점심은 햄 야채볶음밥, 엄청 많이 해서 저녁까지 해결했다. 프라이팬 째로 퍼서 먹으니 설거지거리가 없어서 좋다. 프라이팬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어제는 세끼 다 라면만 먹었는데 똑 같은 라면은 질리니까 각기 다른 종류로 끓여 먹었다. 먹으면서도 건강이 막 썩을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저녁 때 엄마한테서 밥 먹었냐고 전화 와서 알아서 잘 먹었다고 대답했다. - 대학생 유아라(22ㆍ여)
#4 상처받기 싫어 혼밥 / 다른 사람 잘된 얘기 듣기 힘들어
아무도 만나기 싫다. 스터디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얼굴 한번 보자는데 피했다. 다들 열심히 사는 친구들, 만나면 자극도 받고 좋긴 한데 오늘 같이 컨디션 안 좋고 상대적으로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땐 같이 밥 먹기 싫다. 지금의 내 처지도 힘들고, 취준생 중에 다른 사람 잘된 얘기 듣는 것도 힘들다. 근데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서 혼자 편의점 도시락 먹으려니 ‘나는 왜 이렇게 사나’하고 현타(현실 자각 타임) 오는 것 같다. 이런 날은 진짜 진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싶다. – 취준생 박모(25ㆍ여)씨
#5 밥상 데자뷔 / 설거지 귀찮아 반찬통 채로 식사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밥상 풍경을 오늘도 마주했다. 멸치볶음과 묵은 김치, 장조림이 담긴 큼지막한 반찬통들이 손바닥만한 밥상을 점령한 모습은 이젠 익숙하다. ‘밥상 데자뷰’의 반복은 설거지 때문이다. 설거지하는 시간이 아깝다. 설거지거리는 적을수록 좋다. 밥 먹을 때 최우선 고려 사항도 ‘설거지의 최소화’, 기본 반찬은 반찬통 채로 놓고 먹어야 한다. 설거지는 모레쯤 해야겠다. 근데 밥 먹을 때 보니 추석 연휴에 집에서 가져온 반찬들이 아직 반 이상 남아있다. 든든하다. - 취준생 김모(25ㆍ남)
#6 휴식 같은 혼밥 / 회사 스트레스 ‘사르르’
혼밥의 시간은 심신의 휴식이자 치유다. 취업준비 할 때는 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밥 같지도 않은 밥으로 혼밥하는 게 억울하고 서럽기도 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막상 회사원이 되고 나니 오늘처럼 혼밥이 간절할 때가 있다. 불편한 회식 자리에서 상사들 눈치 보느라 소모하는 에너지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집에 오자마자 정말 후딱 먹고 자고 싶었다. 아, 나도 이렇게 세상에 찌들어가는구나! ㅠㅠ.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 온 혼밥의 기회, 먹고 싶던 닭 백숙을 제대로 차려 먹고 나니 왠지 뿌듯하다. - 직장인 김혜림(25ㆍ여)
#7 배달의 혼밥 / 드라마 보며 ‘혼치킨’ 기분 최고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먹고 싶은 메뉴를 신속하게 가져다 주니 이 얼마나 편한가. 돈이 좀 들고 살이 꽤 찐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남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좋다. 입을 크게 벌려도 되고 입가에 양념을 묻혀도 된다. 허겁지겁 먹어도 되고 그릇을 들고 마셔도 상관없다. 특히,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놓고 드라마 보며 먹을 때가 최고다. 치킨 먹을 때만큼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완전히 망가지기 어려운데 혼자서는 가능하다. 오늘 혼치킨(혼자 치킨 먹기) 하다 거울을 본 순간 나도 내가 깼다. – 취준생 곽민해(24ㆍ여)
#8 고생한 내 청춘에 건네는 선물 / 비싼 음식으로 위로 받아
입사 면접을 봤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 진이 다 빠져버렸다. 면접도 망쳤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힘들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나 자신이 뿌듯했다. 그래서 맘 먹고 나에게 저녁을 쐈다. 강남에서 유명한 초밥집. 8만 몇 천 원이 찍힌 메뉴판 때문에 후달렸지만 맛있게 먹어줬다. 고생 심한 내 청춘, 가끔은 이 정도 선물 받을 만 하잖나. - 취준생 정우진(27ㆍ남)
문득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자소서 쓰면서 케이크나 빵으로 때운 끼니가 도대체 몇 번이던가. 혼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처음엔 좀 민망했지만 얼굴에 철판 깐 셈 치고 마음껏 먹었다. 오늘은 진짜 기분 좋은 날이다. - 취준생 박모(25ㆍ여)씨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권수진 인턴기자(한양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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