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신발은 굽이 낮아야 한다는 건 합당한 상식일까, 그릇된 편견일까. 키가 작은 것을 신체적 결점으로 여기는 한국 문화는 남자에게 한결 가혹하고 강력한데, 남자 신발이란 응당 굽이 낮아야 하는 게 상식이라면, 키가 작은 남자는 살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내면의 절규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키높이 구두라는 영리한 속임수가 있다. 겉굽은 낮고, 속굽은 높아 ‘본래 키가 큰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신발은 그러나 신는 이의 내면에 크든 작든 ‘기스’를 낸다. “너 키높이 신었어?”라고 누가 물을 때(묻는 사람이 나쁘다), 듣는 이의 마음에 일 파동을 생각해보자. 드러낸 하이힐과 감춘 키높이 구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왜 여자는 되는 높은 굽이 남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가.
런웨이 장식한 남자의 높은 굽
이 같은 문제의식의 소산일까. 올 가을 유명 디자이너들의 런웨이에 굽 높은 남자 신발이 대거 등장했다. 어떤 것은 굽 높이가 15㎝가 넘는다. 이탈리아의 쌍둥이 디자이너 딘 앤 댄 케이튼이 이끄는 브랜드 디스퀘어드2는 최근 열린 ‘2017년 봄/여름 컬렉션’ 쇼에서 6인치, 즉 15.24㎝ 높이의 글램록 부츠를 모든 남성모델에게 신겼다. 저걸 신고 도대체 걸을 수는 있단 말인가 싶게 어마어마한 높이지만, 런웨이 모델들은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섹시한 클러버 차림새를 매끈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지드래곤 같은 남자들에게만 어울리는 것만도 아니다. 명문 사립학교 모범생 같은 프레피룩에 신어도 크게 이물감이 없다.
패션피플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스웨덴 브랜드 아크네 스튜디오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내년 상반기 남성 컬렉션에 8.5㎝ 높이의 ‘이기부츠(Iggy boots)’를 선보였다. 지난해 여성복 화보에 소년 모델을 등장시켜 ‘젠더 뉴트럴’의 최강 전사임을 입증한 바 있는 패셔너블하고도 정치적인 브랜드다운 행보다. 발렌시아가도 8㎝ 안팎의 부츠를,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찰스 제프리도 높지만 넓다란 굽의 플랫폼 슈즈를 일군의 남성 모델들에게 신겼다. 가디언은 이 같은 현상을 다룬 ‘플랫폼의 귀환: 남성용 신발, 새로운 높이에 이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복고의 영향, 특히 올해 잇단 부고로 전 세계에 충격을 준 팝 가수 프린스와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이 이 같은 새로운 트렌드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급진적인 런웨이만의 사건은 아니다. 이미 주요 남성 브랜드 매장에는 5㎝ 안팎의 굽 높이가 상륙해 있다. 물론 여자의 송곳처럼 아찔한 스킬레토힐은 아니다. 스니커즈 전반에 통굽을 대거나 높다란 판 위에 신발을 올려놓는 플랫폼 슈즈, 청키 힐(Chunky heelㆍ정사각형에 가까운 굵은 굽)을 단 첼시부츠 등이 대부분이다. ‘평범하지만 엣지 있게’를 모토로 하는 놈코어의 자장 아래, 스니커즈에도 다채로운 여성적 코드가 가미됐다. 4~5㎝의 통굽에 징을 박거나 나비 등 애니멀 패턴을 입힌 알렉산더 맥퀸과 띠어리의 남성용 스니커즈가 대표적이다. 사이즈가 클 뿐 디자인으로는 여자 신발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젠더 뉴트럴한 신발들이다.
남자의 하이힐, 키냐 스타일이냐
물론 런웨이의 모델들이 입고 신는다고 해서 거리의 장삼이사들이 반드시 호응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높은 굽은 아직까지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급진적인 아이템이다. 배우 강동원도 지난해 영화 ‘검은 사제들’ 시사회에 킬힐을 신고 등장했다가 파란을 일으켰다. 무려 강동원이 신어도 화제가 되는 패션 아이템을 보통의 한국남자들이 선뜻 따라하기는 어렵다.
키 176㎝의 대학생 변모(25)씨는 “4㎝만 더 커 180㎝이 되면 좋겠다 싶어 5㎝짜리 깔창을 신발 밑에 깔고 다닌 적도 있다”면서도 “겉으로 드러난 높은 굽은 매우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아크네 이기부츠를 보여주자 그가 내뱉은 일성은 “켁”. “로커부츠 스타일은 사실 지드래곤 정도의 감각이 아니면 일반인이 덜컥 따라하기 너무 화려하지 않나요? 제 친구들도 다 비슷한 반응이던데요. 요즘은 티 안 나게 깔 수 있는 5~8㎝ 깔창이 수두룩한데, 굳이 남성용 하이힐을 신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키가 160㎝를 조금 넘는 남성 직장인 김모(28)씨는 “제 키가 작아서 완전 끌린다”면서도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 못 신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깔창만 끼워도 놀림감이 되는데요, 뭘. ‘남자는 키를 높이기 위해 높은 굽이나 깔창을 사용하면 우스운 거야’라는 무언의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대학 1학년 때 깔창 썼다가 친구들한테 놀림 당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남자들이 높은 굽 신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자유로워진다면 당연히 신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용 하이힐은 패션이라는 미학적 측면과 신장에 대한 억압이라는 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굳이 패션피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후자의 기능이면 충분하다. 반면 패션이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남성들도 많다. 워커를 자주 신고 다닌다는 직장인 김종오(28)씨는 동묘 중고시장에 멋스러운 야상을 사기 위해 자주 다닐 정도로 평소 패션에 관심이 있다. 그는 아크네 이기부츠에 “오! 간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분위기에 잘 맞게 신으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굽 없는 첼시부츠가 저런 느낌이라 많이들 신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인이 직접 신을 용의가 있느냐는 물음에는 웃으며 “아직”이라고 답했다.
“지드래곤처럼 하이힐도 종종 신고 패셔너블한 남자가 멋지다고는 생각해요. 그런 남자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남성 패션도 좀 더 다양해지고 자유로워질 것 같기도 하고요. 신발뿐 아니라 옷도 마찬가지로요. 어느 드라마에서 조인성씨가 핫핑크와 파스텔톤 옷을 자주 입고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대학생 채태준(25)씨도 “사실 힐을 신고 싶고, 화려한 옷을 입고 싶어도, 그걸 근사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취향에 대한 어떤 규범이 학습되어야 한다”며 “사람들의 승인된 방식으로 신을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든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처럼 코드화된 패션을 체현하기에는 경제적, 문화적 제약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여성은 오히려 굽 낮은 신발
남성의 신발굽이 높아지기 이전에 여성의 신발은 ‘낮게, 더 낮게’를 지향한 지 오래다. 날렵한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고 있노라면 어딘가 유행에 뒤쳐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스니커즈와 플랫슈즈가 대세가 됐다. 전 세계 패션계를 뒤덮은 놈코어와 애슬레저(운동+여가)의 태풍은 잠잠해질 기미가 없이 클래식으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수트 정장에도, 플리츠 스커트에도, 와이드 팬츠에도 플랫슈즈다. 돌체앤가바나, 아크네 스튜디오, 마르니, 스텔라 매카트니 등 해외 브랜드들도 ‘여성복 런웨이=하이힐’이라는 등식을 무너뜨리며 스니커즈, 슬립온, 슬리퍼 등 플랫슈즈를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 마르니는 낮은 굽 구두에 리본을 달아 여성미 물씬 풍기는 로퍼를 출시한 데 이어 부츠까지도 굽 없는 플랫 스타일을 선보였다. 허윤선 마르니 마케팅 담당자는 “예전에는 플리츠 스커트나 와이드 팬츠에는 하이힐이나 통굽 구두를 신는 게 보통이었는데, 요즘에는 스커트에 슬립온이나 스니커즈를 신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플랫슈즈가 트렌드가 됐다”고 말했다.
키 작으면 어때! 패션은 자유
여성들이 너나없이 플랫슈즈에 안착할 수 있는 것은 키에 대한 압박이 남성들만큼 거세지 않기 때문일 수 있지만, 여성에게 힘과 자유를 선사하려는 페미니즘과 젠더 유동적인 패션 트렌드의 영향도 크다. 큰 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한국 사회의 병적인 문화가 여성이라고 치외법권으로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10세 안팎의 아들, 딸을 데리고 성장판 검사를 일삼으며 장래의 신장에 마음 졸이고, 시술을 서슴지 않는 부모들이 이미 숱하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패션의 압박을 거스르겠다는 의지가 놈코어와 라운지웨어, 애슬레저 열풍 속에는 강하게 스며 있다.
“남자들도 굽 있는 신발 신는 거 저는 너무 좋은데요.” 여대생 한모(25)씨는 “남자든 여자든 자기 단점 보완하겠다는데 고정관념 갖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이상하다”며 “그냥 성별 구분 없이 다 신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키가 작은 걸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긴 거라고 생각해요. 키가 크든 작든,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신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신고, 입어도 괜찮은 사회가 건강한 것 아닐까요.”
하이힐을 반드시 키가 커 보이려고 신는 것도 아니다. SPA 브랜드 자라에서 주기적으로 쇼핑하는 키 177㎝의 40대 중반 남성 조모씨는 “남성이 높은 굽 신는 게 이상해지지 않으면 나도 신어보고 싶다”고 했다. “높은 굽 신발을 신으면 자세도, 핏도, 기분도 달라지지 않나요? 단지 키가 커 보이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기분을 자유롭게 느껴보고 싶어요. 선택에 제약에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남성용 패션과 여성용 패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더없이 촌스러워진 시대다. 여성복의 고전 샤넬 트위드 재킷은 이미 지드래곤의 시그니처 룩이 됐다. 신장과 상관 없이 자신만의 패션을 통해 자아를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성 패션에 가해진 지나친 제한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에게도 하이힐을 허하라.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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