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중심에 있는 제주는 하늘빛으로 느낄 수 있다.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깊고 진해져 높이를 더하는 듯 하다. 그 아래 흐르는 구름의 조각들은 더욱 하얗게 보이고, 흐름을 만드는 바람은 한결 시원해진다. 미치도록 덥던 공기가 마음껏 가슴을 펴고 심호흡으로 청량감을 느낄 수 있는 시기, 그것은 자전거 타기에 아주 좋은 때가 왔다고 몸이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의 포장도로가 자전거타기에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생긴 환상자전거도로는 어떠한 법적 근거로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보호해주지도 못할뿐더러, 도로 위의 자전거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전시행정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타며 즐기는 풍경만큼은 제주만한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고 자유롭다. 해안도로를 달리면 내 옆엔 언제나 바다가 함께 달리고, 산을 오르내리면 옆으로는 깊은 숲이 헉헉대는 숨결에 시원함을 불어넣어 준다. 두 발에 힘을 실어 앞으로 열심히 속도를 내다 보면, 집을 떠나온 몸은 어느새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아름다운 섬을 자전거로 달린다는 건 그런 묘미를 즐기는 일이다.
다섯 번째의 도일주 한 바퀴를 아픈 무릎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고 몇 달을 쉬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었다. 다시 달려야지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 어느 쉬는 날 아침 일찍 나는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내 잠깐의 정비를 마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높았고 바다는 맑았다. 이른 아침결의 바람은 시원해서 페달에 힘을 싣는 다리를 가볍게 했다. 애월 해안도로와 귀덕해안도로를 거쳐 나는, 신창해안도로로 향했다.
번잡해진 지근의 제주 해안도로는 차들도 많아지고 공사도 많아 자전거가 마음 놓고 달리기엔 부담이 있다. 그러나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해안도로는 차츰 나름의 여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 신창해안도로는 다니는 차나 사람들이 별로 없고 제주해안 특유의 자연생태가 나름 보존되어 있어 자전거를 즐기기 좋다. 게다가 오르내리는 경사도 적당해서 버겁지가 않다. 신창을 시작으로 해서 해안도로를 달리면, 처음에는 평탄한 도로로 해서 끝자락 용수에 다다를 때 적당한 언덕경사로 마무리된다. 얼마 달리지 않아 물고기 조형물이 있는 바다 위 다리를 건너 만조가 되면 바다에 잠기는 원담 산책로를 건넌다. 해안 옆으로 높게 서 있는 풍력발전기를 옆으로 지나고, 멀리 차귀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달릴수록 점점 분명해지는 경관이 아름답다. 언덕을 가벼이 오르면 차귀도와 수월봉을 배경으로 용수포구의 낚시꾼들이 보인다. 이어 내리막길의 편안함과 시원함을 즐기다 보면, 김대건 신부표착을 기념하는 성당 앞에서 자전거는 멈추게 된다.
가슴속 청량함과 페달을 돌리느라 조금 힘이 들어간 몸을 용수포구 앞의 바이린 카페에서 커피나 음료 한 잔을 마시며 차귀도와 와도를 감상하며 쉬어주는 시간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차귀도와 용수포구 사이는 돌고래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기도 해서 운이 조금 따라준다면, 멀리 돌고래 떼가 물 위로 둥글게 몸을 놀리는 장면도 구경할 수 있다. 다시 돌아오는 길은 몸이 좀 더 가볍다. 여유롭고 좀 더 수월해진 자전거로 다시 올 때의 풍경을 감상하며 아담하게 자리한 정자에서 잠시 멈추고 시간을 보내보는 것도 가을 낮의 제주를 즐기는 좋을 방법일 것이다.
큰 비나 큰 눈이 아니라면 제주의 사계는 자전거로 즐길 수 있다. 물론 이런저런 장비와 준비물이 필요하겠지만, 봄이나 이맘때의 가을엔 간단한 보호장비만으로도 반나절이나 한나절 자전거를 즐기기 좋다. 번잡하지 않고 차가 별로 없는 해안도로가 딱이다. 서쪽으로는 신창해안도로, 남쪽으로는 사계해안도로나 남원, 표선해안도로, 그리고 동쪽으로는 성산-세화 해안도로가 좋다. 속도만으로 풍경을 구경하는 밋밋한 여행보다는 바람과 길과 느릿한 풍경을 즐기는 자전거 여행을 권해본다. 제주는 원래, 느림을 원하는 삶들이 모이던 공간이었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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