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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그녀의 잔고

입력
2016.10.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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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소설 마감을 끝낸 나와 번역 마감을 끝낸 그녀는 둘 다 눈이 퀭해서는 별 것도 아닌 일에 까르르 웃기도 하고 또 별 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렸다. 산다는 일이란 그렇게 고단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2년에 한 번씩 우울증이 와. 아주 따박따박 빚 받아가듯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거든.” 그녀가 심통을 냈다. 그럴 만도 했다. 전세금이 1억씩 오르는 건 하도 흔한 일이어서 한 달에 백만 원씩 저축을 하면 1년에 1억이 되는 건가, 나는 그런 착각에 시달리기도 했으니까. “이젠 정말 잔고가 딱 360만원이라고. 죽으라고 일하고 있는데 이게 말이 돼?” 하소연하던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번역 의뢰였다. 당장 A4 10 장의 번역을 해치워달라고 했다. 장당 번역료 외에, 급행료로 20%를 더 얹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10%로 합의를 보았다. 그녀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번역료 받으면 밥 살게.”

혼자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나 일 안 해! 소주 병나발이나 불면서 인생을 다 탕진할 거야!” 왜 그래, 왜 그래. 숨을 훅훅 몰아 쉬던 그녀가 대답했다. “파일 열어봤는데 글자 포인트가 6이야.” 나는 길거리에 사람들이 있건 말건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글자 크기 6포인트라면 딱 피라미 눈알 같지 않을까. 아직 노안이 온 정도는 아니라지만 도대체 검은깨처럼 송송 박힌 그 영어 문서를 그녀는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물론 그녀는 소주 병나발을 부는 대신 그 일을 끝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잔고는 360만원뿐이었으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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