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대한축구협회는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이 모 심판위원장이 그 해 5월 심판 체력테스트에서 자신과 친한 후배 심판을 합격시키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발각돼 권고사직 당하자 정해성(58) 당시 경기위원장을 심판위원장에 선임했다. 정 위원장은 심판 출신이 아니다. 프로와 대표에서 감독, 코치를 오래 역임한 지도자 출신이다. 비심판 출신이 아마추어 축구심판을 총괄하는 수장에 오른 건 극히 이례적인 일. 만연한 심판 비리와 불신을 뿌리 뽑겠다는 의미였다. 정 위원장이 주도한 심판 개혁은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동 배정시스템과 심판평가관 제도를 도입해 ‘배정’과 ‘평가’에 투명성을 담보했기 때문이다. 집행부의 신임이 커서 연임이 확정적이었던 그는 최근 축구협회에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앞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축구 공부’를 더해 지도자 복귀를 타진할 계획이다. 지난 16일 서울 한 식당에서 정 위원장을 만났다.
-비심판 출신의 위원장 선임은 파격적이었다.
“제의를 받고 두 번 사양했다. 그러자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해외 출장을 가며 ‘다녀와서 공식 발표할 테니 준비하시라’고 하더라. 반 강제였다. (웃음) 심판이 축구계에서 가장 신뢰도가 낮다. 심판들은 팔이 안으로 굽곤 했다. 잘 못 해도 품고 갔고 바른 소리를 하면 나중에 보복 당한다는 피해 의식까지 팽배했다. 난 잘못된 일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일벌백계했다. 그러자 처음에 반발이 엄청났다.”
-어떤 반발이 있었나.
“심판 체력테스트에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자 몇몇 베테랑 심판들이 탈락했다. 그들이 대놓고 상스런 욕을 하며 불만스러워했다. 알고 보니 전에는 고참들이 기록에 못 미쳐도 눈감아주는 문화가 암암리에 있었다. 이런 일들을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나를 몰아내려 한 적도 있다.”
-또 어떤 일이 있었나.
“서울 모 고교가 전국대회에서 오심으로 졌다. 분석해보니 페널티킥을 얻어야 하는데 심판이 반대로 공격수의 할리우드 액션을 선언했고 골키퍼 차징도 반대로 판정했다. 내가 심판위원들에게 고교에 가서 직접 해명하자고 했다.”
-반대가 컸을 텐데.
“‘한 번 이렇게 하면 매 번 가야 한다’며 다들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니 불신이 생기는 거다’며 강행했다. 피해학교 교장, 감독, 학부모를 모아놓고 오심을 인정했고 사과했다. 해당 심판은 중징계 했다. 학부모 한 명이 울더라. 자식의 진학이 걸린 일이니….”
-위원장의 가장 큰 권한이던 배정, 평가 권한을 스스로 내려놨는데.
“심판위원장이 이를 독점하면 ‘줄 서기’ 문화가 생긴다. 컴퓨터 자동 배정 시스템과 심판평가관 제도를 도입해 그 싹을 없앴다. 지금은 U리그(대학)부터 내셔널리그(실업)까지 매 경기 심판평가관이 파견된다. 이들은 90분 내내 심판만 평가하고 이 점수를 바탕으로 우수 심판은 상위 리그로 올리고 미달 심판은 하위 리그로 내리는 심판 강등제를 시행 중이다. 배정과 평가 시스템만 투명해도 심판계는 깨끗해진다.”
-후임 위원장은 다시 심판 출신일 텐데 이 시스템은 계속 유지되나.
“당연하다. 최근 정몽규 회장과 면담하며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고 공감하셨다.”
-임기 중 못 다한 아쉬운 점은.
“프로와 통합이다.(K리그는 따로 심판위원회가 있음) ‘1국 1협회 1심판위원회’가 국제축구연맹(FIFA) 원칙인데 한국은 20년 넘게 분리돼있다.
-통합을 해야 하는 이유는.
“프로와 협회의 심판 평가 시스템이 다르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프로 심판중 이론 점수에서 10점대(60점 만점)를 맞은 심판도 있었다. 이론이 전부는 아니지만…. 똑 같은 잣대 아래 심판들이 경쟁해 최고 실력자가 프로로 가는 일원화된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협회와 연맹의 힘겨루기 싸움으로 보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여전히 프로가 협회를 못 미더워 한다.
“지금은 달라졌다. 협회가 통합 관리할 여건을 갖췄다고 본다.”
-집행부 신임이 컸던 것으로 아는데 현장으로 돌아온 이유는.
“지인들은 그 나이에 갈 자리도 안 봐두고 사표를 썼다며 타박하더라.(웃음) 나는 코치, 감독 때 말하는 입장이었지만 위원장을 하며 늘 다른 사람 의견을 들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지도자로 마지막 꿈을 펼쳐보고 싶다. 지금 젊은 후배 지도자들이 잘하고 있지만 나에게도 역할이 있을 거라 믿는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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