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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입력
2016.10.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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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0월 18일

어우동을 소재로 한 근작 영화 포스트.
어우동을 소재로 한 근작 영화 포스트.

새 지폐의 여성으로 어우동(?~1480)은 어떨까, 몽상한 적이 있다. 그는 1480년(성종 11년) 10월 18일, 풍속과 법도(三從之道ㆍ삼종지도)를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권력에 의해 교형(絞刑)당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15세기의 기록이 전하는 그의 죄상은, 21세기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성의 자기결정권을 급진적으로 실천한 거였다.

충북 음성의 벼슬하는 양반(박윤창)가에서 태어난 그는 왕실의 먼 친척과 결혼해 세종의 손자며느리 뻘로 신분이 급상승했지만 딸 하나를 낳고 쫓겨났다. 아들을 못 낳아서 그리 됐다는 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정실로 들이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 즉 어우동이 신분 낮은 이를 빈번히 침실로 불러들이다 발각돼서 쫓겨났다는 설은 영 미심쩍은데, 왕가 여인의 부정에 소박만으로 만족했을 만큼 녹록했던 때가 아니어서다. 사정은 달랐지만, 왕비(제헌왕후, 폐비 윤씨)를 폐비시키고(성종 10년) 사약까지(성종 13년) 마시게 하던 시절이었다.

부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일 것이다. 시가에서 쫓겨난 뒤 친가에서도 외면 당한 어우동은 몸종 하나와 단 둘이 빈한하게 살아야 했다. ‘삼종의 도’의 조건 자체를 박탈 당한 그는 살기 위해 기녀(妓女)가 됐다.

그 전에도 여러 남자와 성관계를 즐겼다는 설은 사실일 듯하다. 평민의 성풍속이 그러했고, 윤리도 관대했다. 어쩌면 그는 신분사회의 상위계급에서 퇴출된 뒤 계급적 정체성을, 원해서든 아니든, 현실에 맞게 변환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미모와 함께 시서(詩書), 거문고와 춤 등 예(藝)에 능했다. 종실과 양반 관료, 중인ㆍ천민 등 스스로 찾아오거나 그가 끌어들인 남자들이 허다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성적 쾌락을 위해서였건 위선적인 성윤리를 조롱하기 위해서였건 스스로 선택해서 그 삶을 누렸고, 남성 특히 양반들은 그가 허락한 유희에 흔쾌히 엎드렸다. 그의 이름을 제 몸에 문신한 이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지배계급은 그의 성적 급진성에서 모욕감과 함께 체제전복적 파괴력을 감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그에게 덮씌워진 요녀(妖女)의 이미지는 성종실록이나 용재총화 같은 성리학자들의 기록 탓이 아니라 그를 성적 요깃감으로 소비해온 20세기 이후의 게으른 영화와 야담류 대하소설 탓이다. 용모를 알 수 없는 그를 지폐 모델로 삼자면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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