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며, 성장을 위한 대가로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신화가 우리 사회를 수십 년 동안 지배해왔다. 불평등을 대가로 지불해야 성장할 수 있으며, 성장은 자동으로 행복을 가져온다는 허상이다. 이 허상은 지난 수십 년도 모자라 미래 우리 삶의 경로까지도 계속 지배할 작정인 것 같다.
과거의 경제학자들, 스튜어트 밀이나 케인스 등은 ‘어느 정도까지의 성장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도덕적, 정신적 진보, 삶과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될 날이 올 것’이라 예측하였다. 발전을 이루게 되면 성장이라는 수단보다는 행복과 복지라는 목적을 중요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부는 증가했지만 소위 ‘진짜 문제들’에 우리가 골몰하는 단계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우리들의 머리는 여전히 생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사회라는 기차는 여전히 성장을 향해 달려간다.
성장 이후에도 행복과 복지에 관한 관심은 사회의 핵심적 목적이 되지 못하였다. 성장을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을뿐더러 더욱 심화하였다. 불평등은 단순히 소득과 재산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불평등은 사는 동네, 어린 시절부터의 교육과 성장, 여가, 질병, 심지어는 죽음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삶의 모든 국면에서의 차이를 가져온다. 교육의 성취, 건강, 수명에 이르기까지 삶의 요소요소에 사회 최상층과 나머지의 격차는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 부유층을 위해 ‘담장 처진 도시’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잡지에서도 언급되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되었다. 저임금과 가난은 통계수치 이외의 곳에서는 보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저임금과 가난,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질곡은 가시화되지 않는 영역으로 자꾸 숨어든다. 죽음 이외에 이를 알릴 방법조차 변변치 않다. 변칙적이고 개별화된 고용형태들을 일반화시킨 노동의 유연화는 단결의 조건을 침식하였고, 끊임없는 재개발은 빈자들의 공동의 삶의 터전을 몰아내고 분산시켰다. 서로 의지하며, 함께 협력하며, 저항할 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좌절의 개인화이다.
그럼에도 불평등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계속 정당화되고 있다. 정말 그러한가. 서구의 많은 연구는 성장의 낙수효과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들에 더는 사실이 아니며, 우리가 한배를 타고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즉, 성장이 반드시 대중의 행복을 의미하지 않으며, 특히 분배의 고리가 끊긴 이 시대에는 오히려 다수의 사회경제적 지위 추락을 대가로 한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같은 학자들은 성장은 사회문제의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며, 우리 사회의 경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매일 매일 확인되는 계층질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피로감을 삼키며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되뇌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현재 사회체제 및 권력 유지를 추구하는 자들이 내보내는 메시지는 ‘대안은 없다’라는 것이다. 현실의 벽은 높고, 세계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장을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경쟁보다 서로에 대한 돌봄, 협력을 추구하는 하는 다른 세계를 갈망한다면, 여전히 다른 선택은 가능하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실상 각자가 발 담그고 구성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꿀 가능성은 우리가 기존과는 다른 선택을 할 때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권력을 그대로 둔 채 누군가가 약속하는 ‘가짜 행복’은 자리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다수의 의지를 통한 사회의 경로 전환을 경험한 바 있다. 갈망한다면, 다수의 복지를 중심에 둔 더욱 평등한 세상으로의 방향 전환은 선택 가능하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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