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다. 이쯤이면 직원들이 가방을 싸서 서둘러 회사를 빠져 나가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예상과 달리 일어서는 직원은 없다. 사무실에 있던 3, 4명 직원들은 여전히 뭔가 할 일이 많은 듯 바삐 움직인다. “6시간 노동제를 한다고 해서 야근을 아예 안 한다는 건 아니에요.” 당황한 표정을 눈치챈 듯, 한 직원이 슬쩍 일러준다.
2012년 3월부터 4년 반 이상 ‘6시간 노동제’를 유지해오고 있는 경기 파주출판도시의 보리출판사를 13일 찾았다. 이웃 일본의 주 4일제 근무 때문에 다시 주목 받는 게 이 출판사의 ‘6시간 근무제’ 모델이다. 주 4일제의 경우 1일 8시간 근무 기준으로 보면 주 32시간을 근무한다. 1일 6시간은 주 5일 근무에 따르면 30시간 근무다. 우리에게 이미 선진적 모델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정한 이유도 네덜란드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다. 네덜란드는 연 노동시간 평균이 1,380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짧다. 6시간 근무제로 하면 연 1,386시간이니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2,110시간대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평균에 비하자면, 이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숫자인가 싶기도 하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다. 이날 오후 4시 퇴근자가 없었던 건 월간지 ‘개똥이네 놀이터’ 마감일이 18일이어서다. 출판사에서 마감은 피를 말리고, 야근을 부른다. 보리도 예외일 수 없다. 다만 수당 지급 대신 초과 시간을 모아 휴가로 쓸 수 있는 ‘시간적립제’를 도입했다. 수당을 주게 되면 이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결국 6시간 근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다. 대신 초과 근무에도 한계가 있다. 부서장 승인 아래 한 달에 18시간을 넘어갈 수 없다. 그 이상일 경우 담당 부서장이 이사회에서 승인 받아야 한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몇몇 대기업들이 일찍 출근하면 일찍 퇴근시켜준다는 ‘조기출퇴근제’를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출근시간만 빨라졌을 뿐이다. 그래서 윤구병 대표가 “24시간 고민하는 게 편집자인데 4시 퇴근했다고 생각을 멈추는 게 아니다” “사람의 집중력은 3시간을 넘지 못한다, 오래 하는 게 아니라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오히려 직원들이 가능할까 의심했다. 더구나 출판사 일은 생산공정에 맞춰 결과물을 뽑아내는 제조업이 아니다. “처음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부서장 중 한 명이 시간적립제를 100% 활용하겠다며 ‘나는 노동자’라 선언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기획실 김성재씨의 말이다.
똑같은 일을 6시간 안에 끝내기 위해서는 더 촘촘한 업무 계획, 더 세부적인 업무 동선을 짜야 했고 집중적으로 일을 해야 했다. “6시간 이상 일하는 건 성실해서가 아니라 일을 못해서”라는, 누군가에게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 각 부서 연평균 노동시간은 1,400시간 정도다. 일이 가장 많다는 디자인부서는 1,516시간이다.
직원들 만족도는 높다. 육아에 유리한 건 물론이다. 싱글맘인 편집자 A씨는 “13살 딸을 키우는 데 이런 직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공서나 은행 일을 보려 짬 내는데 눈치 볼 이유가 전혀 없다. 휴식과 자기계발에도 열심이다. 다른 출판사에서 옮겨온 조서연씨는 “예전 직장은 밥 먹듯 야근하고 집에선 쓰러져 자기 바빴다”면서 “지금은 컴퓨터도 배우고 남은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직은? “전혀 생각 없다”고 말했다.
보리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고쳐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자전거를 배웠어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죠. 그런데 지금 내가 뭔가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습니다.” 김씨의 말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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