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0월 14일
지난 달 별세한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더불어 1994년 10월 14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중동 평화의 상징적 제단에서 그가 나머지 두 수반과 나란히, 어쩌면 더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한 까닭은 그의 특별한 이력과 신념 때문이었다.
페레스는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0대 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는 60년대 말까지 맹렬한 시오니스트였고, 자주국방과 유대인 정착지 확산을 당연시하던 강경파였다. 43년 청년시오니즘 노동자당 서기가 됐고, 48년 독립전쟁 직후 해군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이끌었고, 국방장관으로서 이스라엘 군비 증강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과 테러를 겪으며 군사적 해법으로는 중동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당 집권기 외무장관으로서 91년 마드리드 중동평화 국제회의 이후 PLO와의 비밀 협상을 주도했다.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일련의 ‘걸프전’에서 PLO가 이라크를 지원함으로써 사우디 등의 지원이 끊겨 궁지에 몰린 점이 평화협상의 호재였다.
93년 9월의 오슬로 협정(정식 명칭은 ‘잠정 자치정부 구성에 관한 원칙 선언’)은 사실상 그의 작품이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이스라엘군 철수,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자치권 인정. 세계는 비로소 중동 평화의 물꼬가 열렸다고 환호했고, 주역 세 사람은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탔다. 하지만 양측 강경파의 반발로 그 기대는 무너졌다. 하마스는 더욱 급진화했고, 이스라엘은 라빈 피살 이후 우파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됐다.
이후에도 총리(95~96년) 총리와 대통령(2007~2014)을 지낸 페레스가 중동 평화의 상징일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배타적인 종교민족주의 정치이념이라 할 만한 시오니즘의 성채 안에서 평화ㆍ화합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고, 은퇴 후에도 자신이 설립한 ‘페레스 평화센터’를 운영하며 이해와 공존을 추구했다.
9월 30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장에서 네타 나휴 총리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이 악수를 나누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눴다가 자국 강경파들에게 호된 비난을 받았다는 소식을 최근 전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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