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는 타자치고 흙수저는 삽질’(본보 9월 22일자 12면) 기사와 ‘김제동 영창 발언 논란’이 군 생활의 기억을 깨웠다. 1994년 이른바 마지막 방위로 소집된 나는 흙수저지만 타자를 쳤다.
신병 훈련 후 OO기무부대 전속을 명 받았다. 일단 원산폭격을 시킨 고참들은 기무부대가 얼마나 편하고 힘이 센 곳인지 일장연설을 했다. 다음날 신고식, 부대장은 대뜸 “누구 빽이냐”는 취지로 물었다. 신병 6인은 노동자 농민 영세업자 기껏해야 회사원의 아들이었다. 빽이 없는 우리는 곧바로 엄동설한 군용트럭에 실려 사단 사령부로 쫓겨났다. 저 기사로 미뤄 그 빈자리를 국회의원 부장판사 장군 등 고위직의 아들과 손자가 메웠다니 뒤늦게나마 감읍하다.
각 잡고 대기하는데 누군가가 타자 실력을 물었다. “30타지 말입니다.” 한달 뒤 300타를 칠 자신이 있으면 따라오라고 했다. 무조건 갔다. 좀체 늘지 않는 타수 탓에 매일 대가리(라고 해야 맛나다)를 두들겨 맞았다. “화장실 다녀오겠지 말입니다”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울음이 터지기도 했다. 한달 뒤 300타를 쳤다. 이어 장타 450타, 단타 700타라는 경지에 올랐다. 군은 위대하다.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다시 태어난 나는 사단 신병교육대 현역 훈련병 신상을 전산 등록하고, 군번을 부여하고, 인성검사(KMPI)를 하고, 종국에 각 부대로 배치하는 신병 전속 임무를 맡았다. 당시 육군본부는 인사 청탁을 봉쇄하기 위해 ‘신병 전속프로그램 버전 3.0’을 배포했다. 장교 1명, 훈련병 대표 3명(요즘엔 부모도 참여하나 보다)이 2개씩 원하는 숫자를 넣으면 자동으로 배치가 완료되는 식이다. 최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방위병 주제에 육본 출장을 가는 영예도 누렸다.
“누구 좀 편한 부대로 보내달라”는 별들(본인 또는 지인)의 청탁은 끊이지 않았다. 첨단 시스템을 들먹이면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러다 영창 가지’ 싶었다.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의 “그냥 해” 한마디에 깜도 안 되는 인사를 채용했다고 법정에서 고백(?)한 중소기업진흥공단 사장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 ‘누구’들의 신상을 꼼꼼히 살펴보니 한결같이 애초 전투경찰이나 특공대 등 불편한 부대 전속 기준(군사기밀인 걸로 기억하므로 밝히지 않는다)에 미달했다. 굳이 청탁을 안 해도 됐다는 얘기다. 이후 그 사실을 숨긴 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편한 부대로 보내주겠다”고 확답했다. 결국 잔꾀 덕에 난 위기를 모면하고, 상대는 청탁이 성공했다고 여겼을 테니 방위 좋고 장군 좋았다.
묘하게 내 소집 기간 동안 청탁대상 중 단 한 명도 해당 기준에 들어맞지 않았다. 감사할 일이다. 만약 있었다면 병적 대장을 조작해야 한다는 유혹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신병 자대 배치 후 벌어졌을 2차 청탁(보직 부여)은 앞서 밝힌 기무부대 해프닝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아들 사례로 짐작하기 바란다. ‘코너링’ 실력은 확인 못했으나 원조 우 수석의 아들들은 내가 근무한 사단 사령부에도 서식했다. 그러니 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돌아간다고 문제가 없다는 국방부의 해명은 현장을 모르거나 모른 체 하는 소리다.
20년 전 일이라고 눙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방산 비리, 병역 비리, 인권 유린, 성폭행 등으로 얼룩진 군을 믿지 못하는 오랜 믿음은 대개 사실로 확인되는 게 씁쓸한 현실이고 저간의 사정이다. 세월이 흘러도 군은 그대로라니 더럽게 반갑다.
소집 해제 한 달 뒤쯤 부대에서 밤늦게 전화가 왔다. “아무리 해도 전속 프로그램이 안 돌아간다”고. 다음날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민간인 신분으로 위병소를 당당히 지나 사령부 깊숙이 들어가 임무를 완수했다. 당시 막노동으로 벌던 일당 3만2,000원은 국방을 위해 포기했다.
참, “1994년 3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31사단 신병교육대를 나온 여러분(적어도 3,000명)은 금수저든, 흙수저든 훈련 이후 부대 배치만큼은 공정하게 이뤄졌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단결!”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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