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이나 지방으로 이사를 생각하는 지인 중에 열악한 지역의 문화 환경에 대해 우려하는 경우가 더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온갖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인 삶의 고비를 결정하는 데 중대한 요소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여유가 넘쳐나서 일삼아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 아닌데도 그런 걱정들을 한다. 어쨌거나 그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별 ‘문화생활’을 하지 않는 나의 미개함 탓일 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소읍이 아닌, 내가 사는 인구 20만 정도의 지방 도시는 그다지 문화의 불모지가 아니다. 전시나 공연이 연중 그칠 새 없고 온갖 축제도 넘쳐난다. 복합영화관도 하나 있고 때로는 일급의 예술가들이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수준의 높고 낮음이야 있겠지만 찾아서 즐기려고 하면 미개인으로의 전락은 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시간과 돈이 문제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도 유명 짜한 성악가의 지방 공연에 가고 싶어 하던 아내를 주저앉힌 것은 10만 원을 호가하는 입장료였다.
그러고 나면 일 년에 몇 차례 아내와 영화관에 가는 것이 우리 부부가 누리는 문화생활 전부다. 그것도 SF와 호러를 좋아하는 아내와 도무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취향이 부딪쳐 각자 영화를 보고 나오기도 한다. 이십 년 넘게 살며 많은 것이 닮게 되었는데 좀체 바뀌지 않는 것이 영화 취향인 걸 보면 문화라는 놈이 꽤 끈질기긴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저께 오랜만에 같은 영화를 보고 심각하게 우리의 생활까지 돌아보게 되었으니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내가 사는 소도시에는 영화모임이 하나 있는데 그분들이 한 해에 몇 차례씩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자리를 만든다. 상업영화에 밀려 스크린을 얻지 못한 영화들 위주인데 관람료가 절반도 되지 않는 데다 의미 또한 깊은 작품들이라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그제는 미국에서 만든 유전자조작(GMO) 식품에 관한 다큐 영화를 보았다. 나름 농민 입장에서 문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나 역시 언론에서 주워섬기는 대로, GMO 농산물이 설마 그렇게 치명적이랴 하는 세뇌에 감염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다큐 보기를 쌓인 설거짓거리 보듯 하던 아내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비장한 목소리로 당장 냉장고와 주방을 뒤져 GMO 식품들을 박멸해야겠다는 각오를 밝힐 정도였다.
나로서는 충격과 더불어 혼자 속으로 부끄러움을 삭여야 했으니 영화에서 유전자조작의 시작이자 원흉으로 지목되는 소위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와 내가 맺고 있는 기나긴 관계 때문이었다. 제초제란 말 그대로 풀을 죽이는 농약인데 곰곰 들여다보면 이 세상의 먹거리는 모두 풀, 그러니까 식물에서 나온다. 고기나 생선도 밑바탕은 식물이다. 그런데 대량생산농업 시대가 되면서 곡물을 얻기 위해 나머지 풀을 죽여야 하는 자연의 역설이 생겨났다. 게다가 곡물은 죽으면 안 되니까 제초제를 맞아도 죽지 않는 조작이 감행되기 시작했고 그게 바로 GMO의 시작이었다.
귀농한 후 십여 년 동안 최소한 땅에 제초제를 뿌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그것만은 땅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호미로 긁고, 로터리를 치다가, 풀을 깎다가, 밭 전체를 보온덮개로 덮어보기까지 노동의 절반 이상이 풀과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전쟁에서 나는 결국 지고 말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일 년에 몇 차례씩 과수원에 제초제를 뿌린다. 풀이 죽어있는 밭을 보는 것은 괴롭고 비참한 일이다. 내년에는 제초제를 쓰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해보지만 지금껏 뿌린 농약만으로도 변명의 여지 없이, 나는 나쁜 농부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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