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커피 중독시대, 차(茶)에 빠지다

입력
2016.10.12 04:40
0 0
고요한 미각으로 즐기는 차 한잔의 온기는 평온함을 선사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고요한 미각으로 즐기는 차 한잔의 온기는 평온함을 선사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차(茶)는 오랫동안 고대 승려들의 정신을 밝히고, 영국인의 식탁에서 술을 밀어내고 지성을 깨운 데 이어, 아편전쟁까지 촉발한 역사의 주연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잠을 쫓지 않을 수 없는 극한 각성의 시대를 향해 달릴 수록, 1순위 기호품의 자리는 강렬하고 묵직한 커피의 차지가 돼 갔다. 그런데 기류가 달라지고 있다.

북미에서는 ‘티(Tea) 업계의 스타벅스’로 통하며 승승장구하던 차 브랜드 ‘티바나’가 2013년 스타벅스에 인수되며 업계의 이목을 끌었고, ‘스타벅스 티바나’는 최근 ‘차와 다도’의 본고장임을 뽐내는 동아시아, 즉 중국, 일본, 한국 등에 상륙했다. 티바나의 국내 론칭을 신호탄으로 잔뜩 영근 국내 차 시장의 경쟁 상품 출시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문명이 만끽한 가장 오래된 자기치유의 미덕이 각성의 첨병을 달리는 한국에서도 재조명되는 걸까.

차를 커피, 과일 등의 재료와 조합해 새로운 맛을 낸 이른바 ‘디저트 티’는 찻잎을 우린 ‘싱글 오리진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차 음료다. 스타벅스의 ‘샷 그린 티 라떼’(왼쪽)와 ‘자몽 허니 블랙 티’. 스타벅스 제공
차를 커피, 과일 등의 재료와 조합해 새로운 맛을 낸 이른바 ‘디저트 티’는 찻잎을 우린 ‘싱글 오리진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차 음료다. 스타벅스의 ‘샷 그린 티 라떼’(왼쪽)와 ‘자몽 허니 블랙 티’. 스타벅스 제공

차가 창의력과 만났을 때

티바나는 지난달 초 ‘샷 그린 티 라떼’와 ‘자몽 허니 블랙 티’ 등 대표음료 두 가지와 유스베리, 제주녹차, 히비스커스블렌드 등 8종의 잎차를 선보이며 연착륙했다. 열흘 만에 100만 잔이 팔려나갔고, 전체 차 음료의 판매 비중이 5%에서 14%로 3배 가까이 뛰어 올랐다. 스타벅스 관계자는 “매장 전면에 음료 이미지를 붙이는 등 프로모션을 하면 당연히 평소보다 판매가 뛰긴 하지만, 이번 티 음료의 경우 목표대비 170% 판매가 이뤄져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설명했다. 또 “커피에 비해 컬러가 화사해 좋아하는 고객도 많고, 특히 카페인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오후 시간에 차 음료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커피믹스 업계의 강호인 동서식품도 최근 프리미엄 홍차 타라(Tara)를 선보이며 홍차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일찌감치 발효차와 블렌딩티에 방점을 찍어 온 오설록은 지난해 대비 매출이 발효차 45%, 블랜딩티 17% 성장했다. 오설록 관계자는 “쓴 맛을 줄인 발효차를 주력 상품으로 개발하는 한편 차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소비자들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형태의 그린티 아포가토, 블렌딩티 등을 선보이고 있다”며 “자체 육성한 티마스터들이 새로운 블렌딩 기법을 연구한다”고 했다. 달달한 과일향, 초콜릿 등의 토핑과 만난 응용 차, 소위 ‘디저트 차’가 “차는 다 그게 그 맛”이라는 초심자들까지 겨냥하며 차 시장의 저변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한국 전통 장에서 추출한 고초균을 활용한 후발효차 ‘삼다연삼(杉) 병차’. 오설록 제공
한국 전통 장에서 추출한 고초균을 활용한 후발효차 ‘삼다연삼(杉) 병차’. 오설록 제공

커피가 주력인 카페시장에서 이례적으로 전통차를 대표 메뉴로 삼은 오가다는 이런 블렌딩티와 과일의 조합으로 젊은 소비층을 겨냥하는 대표 선수다. 오가다 관계자는 “처음 한방차 테이크 아웃 전문점으로 시작했지만 젊은 층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차에 열매, 뿌리 등을 조화시킨 메뉴를 내놓고 있다”며 “자기관리에 관심이 늘다 보니 예전보다 차를 찾지만 전통적인 티백, 잎차 등이 아닌 다른 재료를 섞은 신선한 조합의 음료 인기가 느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오가다의 연 매출은 2012년 35억, 2013년 52억, 2014년 72억, 2015년 100억원을 기록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내놓은 ‘2015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다류)에 따르면 국내 다류 생산 규모는 2014년 기존 총 46.4만톤, 총 생산액 8,197억원 수준으로 2007년 대비 생산량 39.7%, 생산액 66.6%가 증가했다.

가을ㆍ겨울을 겨냥해 선보인 ‘한라봉오미자 블렌딩티’. 오가다 제공
가을ㆍ겨울을 겨냥해 선보인 ‘한라봉오미자 블렌딩티’. 오가다 제공

무한대의 매력, 차에 취하다

국내 1호 티 소믈리에인 정승호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 대표는 “그 향과 종류와 음용법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차의 가장 큰 매력을 꼽는다. 커피도 추출법과 곁들이는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지만 차는 그 소비형태가 더 다양하다는 얘기다.

캐나다 출신 티 소믈리에 린다 게일러드는 ‘더 티 북(THE TEA BOOK)’(시그마북스 발행)에서 “생김새와 맛이 다 제각각이나 기본적으로 녹차, 백차, 우롱차, 홍차, 보이차, 황차 등의 잎차는 모두 카멜리아 시넨시스라는 상록식물의 잎으로 만들어진다”며 “기존 품종을 개량해 인간의 개입과 자연 선택의 결과로 특화된 차나무의 종류는 500가지가 넘는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녹차는 산화를 억제해 잎을 딴 상태를 최대한 보존한 것 ▦백차는 가공을 가장 적게 해 약간의 자연산화만 겪은 것 ▦우롱차는 알맞게 산화시켜 향을 발산한 잎을 불에 구워 꼬아 다시 굽기를 반복한 것 ▦홍차는 우롱차와 비슷하게 제조하나 완전히 산화시킨 것 ▦보이차는 증기를 쐰 가공차를 여러해 숙성 발효시켜 출하한 것 ▦황차는 찻잎을 수북하게 쌓아 물이 적신 천으로 덮어 노랗게 색을 들인 차를 이른다. 우리는 모두 ‘차’로 통칭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이들 차 외에 향이 강한 허브나 약용 식물로 만든 차는 티젠(Tisanes)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캐모마일, 히비스커스, 라벤더, 마테, 루이보스 등이 있다. 차가 커피에 비해 건강음료 대접을 받는 데는 이런 재료들의 약용효과도 한 몫 한다.

정 대표는 “커피와 차의 인기에는 큰 순환 주기가 있다”며 “누구나 열심히 달리고 일해야 할 때 커피가 흥하고 커피에 대한 폭발적 인기가 분수령을 찍으면 차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는 사이클”이라고 말했다. 커피가 각성을 재촉하는 음료라면, 차는 잠시 누리는 틈이자 휴식으로 받아들여 진다는 것이다.

홍차 전문가이자 요리연구가인 안지홍씨 역시 차가 선사하는 “특유의 행복감”에 매료돼 일본홍차협회 차 지도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투명하리만큼 깨끗한 붉은 찻물을 통해 쌉싸래한 향을 느낄 때면 커피를 마실 때와는 완전히 다른 정서적 경험을 한다”며 “그래서 화려한 디저트티보다는 찻잎을 적절한 방법으로 우린 싱글 오리진티를 선호한다”고 했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끓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시간, 포트에 담긴 차를 두, 세 사람이 나눠 마시는 시간이 모두 숨가쁜 일상에 작은 쉼표 같은 느낌이에요.”

따뜻한 물, 한 숟가락의 찻잎, 2~3분의 시간이면 누구나 누리는 찻자리는 거창한 티타임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값싸되 고상한 취향’의 향유가 가능하다는 점은 적잖은 차 애호가들이 차를 예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본 미술운동의 지도자이자 문명 사상가인 오카쿠라 덴신은 1906년 서양 독자를 겨냥해 쓴 일본문화 안내서 ‘차 이야기’(기파랑)에서 다도를 “차를 즐김으로써 누구나 취미 세계의 귀족이 될 수 있다는 동양적 민주주의를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차를 너무 사랑해 찬탄한 나머지 이 책에서 “차에는 포도주 같은 오만함도, 커피와 같은 자의식도, 코코아 같은 멍청한 유치함도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홍차 바이블로 통하는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글항아리)에서 저자 제임스 노우드 프랫은 "차 마시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면 차의 영혼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며 "(차가) 아침을 맞을 때는 조력자가, 한밤에는 외로움을 위로하는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홍차 바이블로 통하는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글항아리)에서 저자 제임스 노우드 프랫은 "차 마시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면 차의 영혼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며 "(차가) 아침을 맞을 때는 조력자가, 한밤에는 외로움을 위로하는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 뱅크

‘골든룰’을 잡아라

갖가지 향으로 블렌딩된 편리한 티백이 즐비하지만 조금 공들여 직접 차를 우릴 요량이라면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정승호 대표는 “커피 시장이 전반적으로 성장한 것은 많은 분들이 ‘제대로 알고 먹기’로 결심하면서부터”라며 “차 역시 한번 공부하기 시작하면 기분, 상황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했다.

안지홍씨는 “누구나 몇 가지 간단한 규칙만 지키면 ‘집에서 내가 우린 차가 제일 맛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른바 골든 룰(The five golden rules)이다. 요약하자면 (1)찻잎은 개봉 후 2, 3개월 안에 마시는 등 신선한 것을 쓴다. (2)찻잔과 티 포트 등은 끓인 물을 넣어도 5도 가량 내려가는 만큼 원하는 물 온도가 있다면 미리 예열해 쓴다 (3)티 스푼으로 적당량의 찻잎을 계량하는 법을 익힌다 (4)물의 적정 온도와 (5)우리는 시간을 지킨다 등이다.

차에 조금 익숙해졌다면 디저트티에 도전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안씨가 올 가을 추천하는 차는 애플티, 바나나캐러멜티 등이다. ‘애플티’ 설탕에 재어 둔 사과를 한 조각 담은 잔에 잘 우린 홍차를 따라낸다. ‘바나나캐러멜티’는 포크로 으깬 바나나 반 개에 300㎖의 물을 넣고 반으로 졸 때까지 졸이다, 찻잎 3티스푼을 넣고 섞는다. 여기에 우유를 넣고 섞은 뒤 한 번 끓어 오르면 캐러멜을 넣고 뚜껑을 덮어 3분간 우리면 아이들도 좋아하는 밀크티가 완성된다.

안지홍 요리연구가가 저서 '티+푸드'에 소개하는 홈메이드 티. 왼쪽부터 애플티, 바나나캐러멜티, 진저밀크티. 진저밀크티는 얇게 썬 생강을 졸인 물에 찻잎을 넣고 3분간 우린 뒤 우유를 붓고 끓인다. 기호에 따라 꿀을 넣는다. 동녘라이프 제공
안지홍 요리연구가가 저서 '티+푸드'에 소개하는 홈메이드 티. 왼쪽부터 애플티, 바나나캐러멜티, 진저밀크티. 진저밀크티는 얇게 썬 생강을 졸인 물에 찻잎을 넣고 3분간 우린 뒤 우유를 붓고 끓인다. 기호에 따라 꿀을 넣는다. 동녘라이프 제공

집에서 즐길 때는 차의 보관법도 관건이다. 모르는 차를 살 때는 소량 포장을 택하는 등 조금씩 구비하고,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둬야 한다. 특히 향신료 근처나 냉장고 안에 두는 것은 금물이다. 찻잎이 수분이나 근처의 온갖 향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단단히 밀봉해 공개나 습기로부터 차단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차라고 늘 평등하거나 우아한 향유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후기 산업혁명 시대 영국 노동자들은 고된 일상을 공장주가 주는 공짜 차 한잔으로 견뎌냈고, 자국이 벌인 전쟁으로 황폐화된 하늘을 응시하던 일본인들은 애써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실에서 차를 끓여냈다. 현실이 냉엄하고 엉망일수록 단지 따뜻하고 축축한 한 모금 찻물과 이를 핑계로 한 정적이 절실했던 셈이다.

오카쿠라는 직접 차를 우려 마시는 행위를 “불가능을 숙명으로 하는 인생의 한 가운데서 그래도 무엇인가 가능한 것을 이루려는 부드러운 시도”라고 정의한다. 짊어진 숙명이 아프게 쌓여가는 날엔, 이제 조용히 찻물을 올리자. 한 잔의 작은 황홀경을 누리며, 천천히 숙명의 전복을 도모하자.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