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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대화재

입력
2016.10.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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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0월 10일

1871년 10월 28일자 '하퍼스 위클리'가 실은 시카고 대화재 그림.
1871년 10월 28일자 '하퍼스 위클리'가 실은 시카고 대화재 그림.

1871년 10월 10일, 시카고 대화재(Great Chicago Fire)가 사흘 만에 잡혔다. 중앙 상업지구를 포함한 도시의 1/3, 약 9㎢가 폐허로 변했다. 300여 명이 숨졌고, 10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8일 밤 9시쯤 시작된 불은 소방 당국의 미흡한 초동 대처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 해 여름과 가을, 비가 적어 건조했고, 당일 강한 남동풍이 불었다고 한다. 도시의 건물 절반 이상이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보도와 찻길도 대부분 나무로 건설된 상태였다. 방수재로 바른 타르가 불기를 더 거칠게 했을 것이다. 1837년 시로 승격될 무렵 4,200명이던 도시 인구는 화재 무렵 3만여 명에 이를 만큼 시카고는 북동부 중심도시로 급성장했고, 화재 당시에도 축산엑스포가 열리고 있었다. 소 먹일 잘 마른 꼴도 지천이었을 것이다.

화재 원인은, 암소가 마구간 등불을 걷어차서 시작됐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특정 민족(혹은 인종)을 희생양 삼아 더 끔찍한 재앙을 부르기도 한다. 시카고 대화재는 도시를 근대 건축의 실험장이자 전시장으로 변모시켰다. 철골공법과 건축재로서의 유리의 가능성이 주목 받던 때였다. 야심 찬 건축가들이 빈 서판 같은 시카고로 몰려들었고, 좋은 입지의 폐허 위에 저마다의 건축 공학과 미학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얇고 튼튼한 철골은 빌딩을 고층화했고, 외부로 열리는 창의 크기를 키웠다. 엘리베이터, 중앙난방, 에어컨디셔닝 등 새로운 기술과 장비의 좋은 실험무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산업ㆍ상업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이 살아나려면 은행도 법원도 카운티홀도 오페라하우스도 다시, 빨리 들어서야 했다. 장식보다는 기능과 실용이 상대적으로 중시됐다. 윌리엄 르 바론 제니(William Le Baron Jenny)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 등 이른바 시카고파의 모더니즘 건축 전시장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카고는 불과 10~20년 사이에 외형적으로 가장 앞선 세계의 도시, 마천루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지금의 시카고는 근대 건축의 박물관이 됐다.

시카고는 하지만, 개발독재의 도시정비사업 같은 폭력적 도시계획 해법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빌딩이 높아지면서 시카고의 빈부 격차도 커졌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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