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생 때 소심하고 숫기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 붙이기를 어려워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용건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입을 딱 봉하고 지냈다. 하긴 그 시절 농촌 아이들은 대부분 그랬다. 학교에 와서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가 종례가 끝나면 책보를 둘러메고 집으로 가는 아이도 있었다. 요즘처럼 학교 수업에서 ‘듣기ㆍ말하기’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박예분의 동시 ‘어떻게 말할까’에서, 아이는 ‘감정을 차근차근 전달하는’ 말하기 방법을 배웠다. 어떤 ‘사실’로 인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바람(원하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흥분해서 주먹이 먼저 나가거나 톡 쏘아붙이지 말고.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 ‘나’를 놀린 녀석에게 배운 대로 말해 보려니 쉽지 않다. 삼 단계로 말해야 하니 해야 할 말도 참 많다. 그래서 “화나고 답답할” 때는 그냥 속에서 나오는 대로 한마디 해버려야겠다는 것이다. “아휴, 꼴 보기 싫어!” 동시라서 차마 심한 표현을 못 썼을 수도 있지만, 꽤나 얌전한 폭발이다.
사실 살다 보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되는 순간들이 있다. 차분하게 조목조목 말해서 설득해야 할까, 싫다거나 좋다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어느 것이든 다 답인 상황보다 어느 것도 다 답이 아닌 상황이 많다.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서 돌아가신 게 명명백백한 백남기 씨를 검찰은 부검을 하겠다는데, 더 밝힐 것이 무엇이 있나.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 말하든, ‘하지 마, 유족이 싫다잖아!’ 한마디든 가슴으로 들었으면 한다. 정치나 공권력이 필부의 상식조차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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