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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과학이 ‘심폐 정지’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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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과학이 ‘심폐 정지’된 사회

입력
2016.10.0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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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시월이면 한국의 과학자들은 곤혹스럽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3년 연속이다. 22대 0이라는 스코어는 그 어떤 스포츠 경기의 결과보다 아프게 가슴을 후벼 판다. 스포츠 한일전에서 패배하면 국가대표팀이 대역 죄인이 되는 나라의 현직 과학자로서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은, ‘죄인’이자 당사자로서 느끼는 답답함과 막막함에는 또 다른 절박함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일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엘리트 스포츠 방식을 그대로 이식하면 정말 10년 안에 수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수상 가능성이 높은 외국 과학자를 모셔다가 공동연구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해 온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결과로 머지않아 ‘1호 과학상’ 수상자가 나왔다고 잠시 가정해보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해묵은 한을 풀었으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보다 근본적인 질문, 왜 우리는 과학을 하는가.

사실 노벨상이야 못 받아도 그만이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과학을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문명사회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과학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언제부터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20세기와 21세기가 과학 문명의 세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과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다.

보다 나은 삶의 양식, 즉 문명으로서의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른바 ‘선수촌 방식’의 과학정책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의 양식은, 예컨대 활성단층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 위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식이었다. 문명사회라면 노벨상을 받을 만한 국가대표를 육성하는 대신, 원전을 짓기 전에, 활성단층 지도부터 작성하려 나섰을 것이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과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선택과 집중’의 갈림길에서 과학을 버리는 선택만 해 왔다. 버림받은 과학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이 노벨상으로 떠들썩할 무렵에 한국에서는 백남기 씨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었다. 심폐 정지로 병사했다는 주치의의 소견이 끝내 고수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땅의 과학이 심폐 정지되는 느낌이 들었다. 과학은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서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한다. 심폐 정지를 사인으로 기재하는 것이 의사협회의 사망진단서 작성지침에 맞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천안함의 침몰 원인은 침수이고 침수의 원인은 승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물을 퍼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정치와 이해관계가 과학을 압도하면 과학은 그저 힘 있는 사람들의 권력과 뒷주머니를 불려주는 야바위 놀음으로 전락할 뿐이다.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들인 4대강 사업도 이 사업으로 수질이 개선된다는 누군가의 ‘과학적인 예측’이 명목상의 근거로 작용했다. 4대강을 뒤덮은 ‘녹조라테’를 두고도 여전히 수질이 좋아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대병원의 석연치 않은 사망진단서는 이제 공권력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과학이 야만을 걷어내기는커녕 야만의 충직한 시녀가 된 셈이다. 정해진 답과 다른 의견을 내면 이내 ‘종북좌빨’이나 ‘사회불안조장세력’으로 몰린다. 이런 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올 리도 없지만, 나온다 한들 그게 얼마나 지속 가능할 것이며 도대체 우리네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확률적으로 본다면 앞으로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조차 우리 사회의 야만에 압사된 과학부터 먼저 심폐 소생하는 쪽이 국가대표 선수촌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이다. 이 땅의 과학자에겐 야만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그래서 논문을 쓰는 것만큼이나 절박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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