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간단한 명제입니다. 간단명료는 언제나 그렇듯 양날의 칼입니다.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니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게 당연하다는 의미도 되지만, 거꾸로 그간 역사와 사회의 핵심이 응축된 정수이니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도 치닫습니다. ‘힙한 코스모폴리탄’이 될 것이냐, ‘깊은 영성주의자’가 될 것이냐. 줄타기를 잘 해야 합니다.
15개 언어를 다룰 줄 안다는 번역가 신견식의 ‘콩글리시 찬가’는 힙한 코스모폴리탄 쪽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 주장은 간단합니다. ‘콩글리시’는 우리 식 변용일 뿐이니 ‘엉터리 영어’라며 애써 추방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이런 표현도 있어, 재밌지?’ 설명해주면 그 뿐입니다.
‘싱글리시’ 논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싱글리시는 중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싱가포르식 영어입니다. 싱가포르 정부도 한 때 ‘싱글리시 추방 운동’을 벌입니다만, 당연하게도 이런 유의 운동은 성공할 턱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영어의 본토라는 미국에서조차 히스패닉계 등 다른 언어공동체의 영어 변용이 늘어나면서 ‘대체 영어의 표준형이란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그 때문에 ‘토익’ 같은 시험에도 비영어권 영어 사용자들의 표현과 발음들이 반영되는 분위기인데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린 한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일제 잔재 청산. 일제를 거친 외국어를 쓰느니 차라리 직수입 본토 외국어를 쓰려는 과도한 욕망입니다. ‘사라다’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다양하게 풀어냅니다. 일본식 조어로 근대를 맞아들인 한국이, 정말 잔재를 싹 다 쳐낼 수 있을까요.
이리 말하면 너무 무거워지는 감이 있는데, 이 책의 본질은 사실 ‘아재 개그’입니다. 15개 언어로 다양한 번역작업을 해왔으니 언어 유희 소재야 끝이 없겠죠.
가령 hell은 독일어로 ‘밝은’, korea는 핀란드어로 ‘다채로운’이니까 ‘헬조선’은 상서로운 징조라 합니다. 김영란법 때문에 관심받는 ‘더치(dutch) 페이’를 두고서는 더치가 실은 ‘도이치(deutsch)’ 아니냐고 말합니다. 연인, 부부 사이에 입는 ‘커플 룩’을 두고서는 일본 표현 페어 룩(pair look), 독일어 표현 파트너 룩(partner look)을 끄집어내 비교하면서, 독일인이 독립적이고 한국인이 밀착적이라는 결론으로 치닫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너무 젊어 보여 루즈를 발랐다(wear rouge)는 소문이 돌았다”는 번역을 두고서는 누가 마초 장군 입술을 붉게 칠했냐고 낄낄댑니다. 루즈는 얼굴 화장을 뜻합니다.
언어는 역사, 사회적 산물이기에 절대가치를 지녀서가 아니라 거꾸로 언어를 통해 역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 묘미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독한 언어순결주의조차 우리 역사, 사회의 한 단면으로 남겠지요. 빌 브라이슨 같은 해학이면 충분한데도요.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