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초기엔 밀렸지만…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든 이후
정부군ㆍ다국적군 습격 대신
요충지 마을 장악으로 전략 변경
영향력 줄기는커녕 여전히 건재
▦무력한 아프간 정부군
다국적군 조언ㆍ월등한 병력 불구
美 지원금 착복 등 부패 만연
올 전 국토의 5% 통제권 뺏겨
▦전쟁에 지쳐가는 국민들
포연ㆍ총성 속의 나날에 한탄만
“평화는 한쪽의 완전한 승리뿐”
정부군 핍박에 탈레반 편들기도
美 ‘책임있는 퇴각’이 변수 될 듯
15년 전 10월 7일은 미국이 9ㆍ11 테러의 충격에 대응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날이다. 최초의 표적은 극단주의 무장집단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서전은 성공적이었다. 수도 카불을 장악했던 탈레반 정권은 험준한 산맥 사이로 숨어들었고, 세속적인 새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탈레반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미군의 공격을 받은 2001년 이래로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2014년 12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종전을 선언하며 병력을 대거 물렸지만 올해 7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차기 정부까지 최소 8,400여명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만큼 탈레반의 위협이 강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다국적군 공세 맞서 ‘버티기’ 들어간 탈레반
올해 들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전국토의 5%에 대한 통제를 잃었다. 전투력이 문제가 아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2010년에서 2014년 사이 다국적군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참여하는 전투 중 ISAF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는 5%에 불과한 반면 탈레반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는 95%에 이른다. ISAF의 대부분이 철군한 2014년 이후에도 잔류한 다국적군 병력이 군사조언과 훈련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병력의 질만 놓고 보면 정부측이 월등하다.
그런데도 아프가니스탄 경찰과 군 사상자는 계속 늘고 있다. 탈레반의 전략 변화가 주효했다. 올해 6월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탈레반은 지역 거점에서 정부군이나 다국적군을 습격하는 대신 도시와 마을로 진입하는 요충지를 틀어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자 수송 차량을 하나씩 차단하다 보면 마을은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지친 주민들이 떠나면 그 자리를 탈레반이 차지하는 전략이다.
탈레반은 미군의 지지를 받는 정부와 직접 맞서는 대신 미군이 완전히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때까지 버티는 작전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도발 시기도 선택적이다. 3일 탈레반은 가장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북부 도시 쿤두즈와 남부 헬만드주에서 공세를 취했다. 7일이 침공 15주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4~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아프간 국제지원회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도 해석된다.
2014년 대대적인 철수를 택한 미군은 지난해 탈레반의 공세가 줄지 않자 올해 들어 적극적인 공습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이에 탈레반은 전통적으로 적대 관계였던 다른 무장집단 이슬람국가(IS)와 일시 정전협정을 맺고 아프간 정부군과의 충돌에 화력을 집중했다. 덕분에 미군의 공습이 집중된 난가르하르와 쿠나르주에서도 탈레반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 “탈레반이 낫다”
헬만드주는 특히 아프간 내전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탈레반의 본거지 중 하나인 이 지역에 수천명의 해병대를 파견해 전황의 극적인 변화를 노렸다. 그러나 결과는 갈수록 참담하다. 올해 들어 나드왈리, 가름시르, 나와 등 주도 라슈카르가에 인접한 지역이 차례차례 탈레반의 손에 떨어졌다.
민심도 흉흉해졌다. 카불의 저널리스트 순 엥겔 라스무센이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를 통해 전한 바에 따르면, ‘현 정부보다 오히려 탈레반이 낫다’는 여론이 조심스레 확산되고 있다. 굴람 모하마드(55)는 정부군이 무분별하게 자신의 물건과 가축을 징발한다며 “정부군은 도둑이다. 탈레반은 최소한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헬만드 현장의 소식에 정통한 카불의 연구자 라흐마툴라 아미리는 “2월에 탈레반측으로 넘어간 헬만드주 북부 무사칼라에서는 정부군 점령기 유령도시였던 마을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고 소개했다. 정부군이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는 반면 탈레반은 점령지 시민들이 이슬람교에만 충실하다면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탈레반도 정부에 연관된 인물이나 비교도를 무자비하게 사살해 왔기 때문에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다.
원인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경찰의 무능력과 부패다. 9월 16일 미국 감사조직인 아프가니스탄 재건 특별감찰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위해 쏟아 부은 돈은 1,000억달러가 넘으며 이 중 대부분이 무의미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특히 보고서는 군과 지역경찰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군자금을 군사력 강화에 쓰는 대신 개인용으로 착복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 사령관은 보유 중인 군사력을 뻥튀기해서 보고하거나 피해 최소화를 위해 전투에서 도망치기 급급하다. 탈레반의 급조폭발물(IED) 공격에 두 다리를 잃고 이탈리아군이 운영중인 라슈카르가의 긴급수술센터에 입원해 있는 경찰관 오마르 샤(24)는 “문제는 탈레반이 아니라 경찰 수뇌”라며 “파견 당시 전 사령관은 경찰 400명이 있다고 말했지만 와서 보니 120명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아프간 정부도 실태를 알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올해 4월부터 헬만드주를 맡게 된 하야툴라 하야트 주지사는 “아프간 지역경찰은 100% 국가경찰이 아니다”고 지적하며 “지역 지도자들이 자기 부족 사람을 중심으로 부대를 짜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득권화돼 통제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최근 가름시르구역 경찰서장을 파면했다가 그의 형인 국회의원이 카불에서 반대집회를 여는 바람에 곤란에 처하기도 했다. 다양한 부족이 하나의 국가로 모인 아프간의 강력한 지역주의가 ‘외부인’의 개입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 사이 딜레마
한때 탈레반 정권을 축출한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이제 전쟁에 지쳤다. 그들은 그저 탈레반과 정부 어느 쪽이든 한 쪽이 완전히 승리해 평화가 오길 바랄 뿐이다. 전쟁터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원인 모를 공격에 죽음을 맞고 있다.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15세 소년 압둘 하킴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라슈카르가로 오던 중 목숨을 잃었다. 가족들은 범인이 정부군인지, 탈레반인지 밝혀낼 방법이 없다. 하킴 집안의 가장인 하비불라는 “안전이란 없고 우리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며 “신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신다”고 한탄했다.
미국도 해외개입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국민 여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어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미국이 아프간 주둔군을 빼지 못하는 이유로 ‘IS 트라우마’를 든다. 이라크 조기 철군과 시리아 내전 불개입이 IS가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줬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미군의 존재감이 사라지면 아프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뿐 아니라 IS가 새 영토를 얻을 수도 있다.
미국은 ‘책임 있는 퇴각’을 목표로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사이의 평화협정을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아프간 정부는 9월 30일 악명높은 군벌 출신 반군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헤즈베이슬라미아프가니스탄(HIA)’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대 내전 당시 시민 수천명을 죽여 ‘카불의 도살자’라 불린 헤크마티아르는 평화협정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았다. 정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 범죄자에 면죄부를 준 것이지만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는 5일 아프간 지원회의에서 “탈레반이 비슷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다국적군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 근본적인 해법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자립이다. 5일 지원회의 결과 국제사회는 아프간 정부가 부패 척결과 기반시설 투자 등 주요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2020년까지 152억달러를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 아프간에는 아직 1조~3조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는 철, 구리, 금 등의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어 적절한 산업기반과 기술만 뒷받침되면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빈곤과 폭력 등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치안체제가 먼저 수립돼야 한다. 정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삶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하지만, 평화가 정착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현실을 아프가니스탄은 직면하고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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