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는 ‘안기부 불법 도청’ 의혹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당시 한나라당 의원 정형근이다. 그는 2002년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 과정에 청와대 로비가 있었다”며 근거로 안기부 도청 자료를 제시했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휴대전화 도청은 불가능하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하지만 3년 후 ‘삼성 X파일 사건’이 불거진 뒤의 검찰 수사에서는 안기부 불법 도청이 사실로 드러났다. ‘DJ 저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의 정보력 원천은 국정원 내부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공안검사와 국정원을 두루 거치면서 쌓은 인맥이 ‘빨대’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 보수정권 들어서는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막강한 정보력을 과시하고 있다. 검찰총장 후보 첫 낙마 사례인 2009년 천성관 인사청문회는 그의 독무대였다. 청문회 전날 박 원내대표는 보좌관들에게 불쑥 자료를 던져줬다. 천성관을 무너뜨린 ‘스폰서 동반 해외골프여행’을 입증하는 출입국 기록이었다.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 등 그의 정보망에 걸려들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인사가 여럿이다. ‘인사청문회 낙마 8관왕’이라는 별명도 그렇게 붙었다. 박근혜정부의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때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채 총장을 사찰해 온 사실을 폭로해 정권을 곤혹스럽게 했다.
▦ 박 원내대표의 정보력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청와대 대변인, 정책특보 등을 맡으며 구축한 네트워크 덕분이다. 그의 정보 출처는 정치권부터 국정원, 검찰을 포함한 국가기관까지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꼼꼼한 메모 습관과 이를 기록한 수첩이 정보력의 산실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의 손에 항상 들려 있는 수첩에는 정보와 일정, 메모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한 실시간 정보에도 발 빠르다.
▦ 박 원내대표가 국감에서 국정원이 박 대통령 퇴임 후 머물 사저 터를 물색했다고 주장하자 청와대가 발끈했다. 청와대는 “퇴임 후 삼성동 사저로 들어가기 위해 경호와 보안문제를 협의했을 뿐”이라며 “사저를 정치공세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격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박 원내대표는 “국정원과 협의 중이라는 것은 인정한 셈”이라고 했다. 진실 여부는 그렇다 쳐도 청와대에서도 서너 명밖에 모르는 기밀인 대통령 사저 문제가 흘러나온 것을 보면 권력이 기울기는 기운 모양이다.
이충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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