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홍길동은 탄식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신분 차별 때문에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하는 그 ‘한’의 정서를 계승이라도 했는지, 2016년 한국에서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현상이 풍작이다. 최근 언론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김영란법’ 시행 이후 바뀐 풍경을 보도하고 사회적 부작용을 우려한다. 법안의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인데, 너무 길다면 ‘부정청탁 금지법’이라는 약칭을 쓰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딴 ‘별칭’에 집착하는가.
이름을 붙이고 또 부른다는 것은 정체성을 규정하고 의미를 맥락화하는 작업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이 꽃과 눈짓이 되듯이, 배구공이 ‘윌슨’이라는 친구가 되기까지, 언어는 사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것의 존재론적 의의를 규명하거나 부여한다. 명명은 존재를 한계에 가두기도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역시 불완전한 언어로나마 최대한 진리에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즉 의도적으로 특정 명명을 기피하는 행위는 의미를 은폐하고 훼손하려는 의지의 표출이다. 나는 9월 중순 한국 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길거리 괴롭힘ㆍ성폭력ㆍ성희롱 말하기 대회 오픈 라디오’에서 강제성추행이 ‘엉만튀’ ‘슴만튀’로 소비되는 현상에 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잘못된 명명 안에서 범죄라는 인식이나 피해는 삭제되고, 놀이와 가벼운 일탈이라는 인상만 남는 것이다. ‘바바리맨’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부른 결과, 공연음란 성범죄자가 대기업 광고에 익살스러운 존재로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김영란법이라고 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비현실적인 법안을 발의한 사람 때문에 겪는 불편함과 갑작스러운 변화로 양산되는 피해자(자영업자, ‘쫄쫄 굶는’ 기자 등)의 이미지이다. 반면 부정청탁 금지법은 성격과 목적과 분명해지면서 이전까지 누려왔던 혜택의 의미나 그것이 얼마나 만연했는지 등을 낱낱이 드러낸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은 ‘성과연봉제’ 도입에 반대하며 파업했고, 이를 막아냈다. 임금을 직무와 성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여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 제도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결국 성과를 빌미로 쉬운 해고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초래하여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균질화한다. 임의 해고제라는 명명이 더 적절한 까닭이다. 성과연봉제라는 좋은 개살구의 빛깔은 문제점을 지우고, 반대하는 자들에게 ‘이기주의자들(월급을 축내는 무능력자들)’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여성혐오 범죄 역시 ‘묻지 마 범죄’로 표백된다. 범죄자가 유일하게 묻는 것이 여성이라고 인지되는 사회적 성별 코드인데도 말이다. 이를 여성혐오 범죄라고 제대로 명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여성혐오와 여성 대상 폭력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첫 번째 단추일 것이다.
이 외에도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고 백남기 씨의 사인을 ‘병사’라고 눙치기, ‘걸크러쉬’ ‘브로맨스’라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여 동성 간 이끌림을 탈 성애화 하기, 아동성애를 ‘로리로리’,‘순수한 모습에서 얻는 힐링’으로 포장하기 등 모두 의도적으로 어떤 것을 지우고 어떤 것을 부각하며 특정 방향으로 의미를 일그러뜨린다. 따라서 이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정확한 ‘이름 짓기-부르기’가 필요하다. 더 번거롭고 어렵고 까다로울지라도, 심지어 위험하고 불온할지라도.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을 빼앗긴 이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마녀에게 종속된다. 올바른 명명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이름 몇 글자가 아니라, 불확실하고 기울어진 세계를 제대로 표상하려는 감각의 존귀함이기도 하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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