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광풍 빗겨간 아늑한 둥지
제주살이 묵직한 추억이 담긴 곳
고양이 반겨주고 바람커피 한잔에 위안
제주로의 이주는 이제 하나의 유행 같다.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사는 곳으로 그리고 여행하는 곳으로의 제주는 이슈의 중심이 되어, 많은 것들을 번잡하게 하고 때로는 마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는 곳이 돼버렸다. 너무 많아진다는 것 또는 복잡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흐려지고 관심과 소중함도 잊게 만든다. 너무 많은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의 가치와 사람들에의 관심이 흐려지고 있는 곳이 요즈음의 제주가 아닌가 싶다.
5년여 전만 해도, 제주는 여행지로서 또는 사는 곳으로서 소소함과 여유가 가득한 곳이었다. 여행은 보다 순수했고, 사는 모습은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이었다.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은, 나름 중요했다. 이해관계를 떠나 고립된 섬에서의 삶과 여행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밀도는 적당한 농도를 만들었고, 모든 사람들이 농도가 흐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관계의 밀도를 이루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제주뽐뿌’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제주를 알렸던 이담씨가 카페를 차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제주뽐뿌는 당시 제주여행과 제주살이 정보의 중심에 서 있던 이담씨의 개인블로그였다. 한라산에서 동상과 사고로 사람들이 죽지 않게끔 매년 제를 올리는 곳,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곰솔군락이 있는 산천단 안쪽 기슭의 낡은 단층건물을 개조해서 ‘바람카페’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노랑 톤의 분위기와 사막여우가 병풍처럼 뒤를 감싼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한 첫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바람카페는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들과 제주로 이주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에 이미 살고 있는 선주민들 사이에서 만남과 모임의 장소이자, 한 번쯤은 들르게 되는 순례지와도 같은 공간이 되었다. 나 역시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의 바다낚시 선생이라 부르는 동생을 비롯하여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지내는, 곳곳에서 제주살이를 꿈꾸며 이주했던 사람들을 그 시절 그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낮의 바람카페는 돌계단 아래 정원처럼 넓은 들판과 고풍스럽게 선 곰솔이 분위기를 더했다. 그 너머 나무들 사이로 조각처럼 보이는 먼 바다는 아득했다.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눈이 오면 하얗고 소박하게, 바람커피의 맛을 돋우는 그림이 되었다. 바람이 불면 대숲의 시원함이 들렸고, 완벽한 어둠이 내린 산천단 기슭 한 밤의 카페 불빛은 아늑함 자체였다.
이담씨는 어느 날 커피트럭을 하나 장만해서 훌쩍 떠나버렸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커피여정은 최근 개봉한 현진식 감독의 영화 ‘바람커피로드’로 탄생했다. 그리고 산천단의 바람카페는 함께 운영했던 지인이 모습 그대로 현재 카페를 꾸리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이 바람카페만은 비켜간 듯 했다. 연노랑톤의 카페와 사막여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달라진 거라곤, 곰솔주변의 트인 벌판을 정비하여 좀 더 넓고 단정한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공간은 마치, 카페에 딸린 넓은 정원 같은 모습이다.
알다시피 제주의 요즈음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가파른 변화를 겪고 있다. 얼마 전 가 본 곳이 내가 알던 그 곳인가 싶을 정도로, 변화는 점점 가속이 붙고 있다. 그것은 반가움보다는 아쉬움을 더 크게 자아낸다. 문득 바람카페가 생각났던 이유는, 가파른 변화 안에서 낡아갈지언정 여일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주생활을 시작했던 6년 전의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내 제주살이의 묵직한 추억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양이들이 반기는 바람카페에 들러 바람커피 한 잔 들고 지긋이 문 밖의 곰솔을 감상해보시길. 그 풍경이 가파른 변화의 물결을 비켜선 여일한 제주의 모습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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