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
혹시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아 봤는지. 아마도 윗사람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가장 위압적인 말일지 모른다. 윗사람이 이 말을 입밖에 내는 순간, 상호간의 토론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유불문하고 까라면 까”라는 얘기니까.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도 윗사람의 화만 돋울 뿐, 더 이상 아무런 실익도 기대할 수 없다. 단지 견해 차이, 관점 차이에서 온 이견이라면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선악의 문제, 정의의 문제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그 강압적인 지시를 받들어야 하는 아랫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뇌와 싸워야 한다.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그 자괴감이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온전히 알 수 없다.
3년여 전인 2013년 8월1일. 박철규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최경환 의원의 국회 사무실을 찾아간 자리에서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 의원은 행정고시 22회로 박 전 이사장(행시 24회)의 공직 선배였고, 직전까지 중진공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이었고, 현 정부 최고 실세 중 실세였다. 박 전 이사장으로선 그의 말 한 마디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날 사무실을 직접 찾아간 것도 의원실 인턴 직원 H를 채용해달라는 청탁을 이행하기 힘들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히 양해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이사장이 법정에서 밝힌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해본 그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랬다.
“H가 2차까지 올라왔는데 외부위원이 강하게 반발합니다. 여러 가지 검토했지만 도저히 안 되어 불합격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결혼도 시킨 아이인데 그냥 해. 성실하고 괜찮은 아이야. 믿고 써봐.“
“외부위원이 나중에 문제 제기하면 의원님께 누가 될 수 있습니다. 내년에 다시 한번 응시하면 어떨까요?”
“그냥 해.”
어지간했으면 “알았다”며 받아들였을 법한데, 그의 답변은 “그냥 해”였다. “그렇다고 그렇게 굴복하는 게 도의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은 그랬다. 36명을 뽑는 그 해 채용에 몰린 4,500명의 지원자 중 1차 서류 전형에서 2,299등에 그쳤던 H는 그렇게 중진공에 채용됐다.
물론, 박 전 이사장의 증언이 모두 다 진실이라는 확증은 없다. 여전히 최 의원은 청탁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니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 해도 누가 봐도 ‘몸통’이 있을 것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이 사건에서 ‘몸통’은 대면 조사 한번 하지 않은 채, ‘깃털’인 박 전 이사장만 불구속 기소한 건 일반인의 상식과는 너무 괴리가 있다. “그를 만난 기억이 없다”는 최 의원의 4쪽짜리 우편진술서를 받은 것이 검찰이 몸통을 확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의 전부였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며 집요한 ‘하명 수사’를 벌이다 제대로 된 먼지 한 톨도 찾지 못한 채 번번이 허탕을 치고 있는 최근 일련의 기업 수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걸 보면 요즘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으로 투명사회 도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지만, 그 동안 법이 없어서 이런 청탁을 근절 못했던 것은 아니지 싶다. 진실을 밝혀 내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어디 H뿐이겠는가. 이렇게 큰 사회적 이슈가 돼도 어물쩍 덮고 넘어가니, 공기업이나 금융회사 인사 때마다 정치권에서 인사 청탁이 끊이지 않는다.
검찰이 박 전 이사장의 폭로로 마지못해 추가 수사에 나선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얼마나 기대를 걸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냥 해, 이건 중진공 외에도 곳곳에 존재할 H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수많은 청년실업자들이 검찰에 내리는 준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