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후배가 일본의 속살을 보여주는 책을 썼다. ‘토끼가 새라고?’(안목刊) 일본에서 중ㆍ고교를 나온 그는 대학시절 일본인 남친 H를 사귀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방학에만 만나는 사이였다. 그가 졸업 후 영국으로 연수 갔을 때 도쿄대 대학원생이던 H에게 일본에서 파는 가이드북 한 권을 부탁했다. H는 책을 소포로 보내면서 영수증과 계좌번호도 잊지 않았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연수생에게 어찌 그리 매몰차게 느껴졌는지. 만약에 이 일이 없었다면 지금쯤 국제결혼을 하고 H의 마누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일본은 유교 문화권인데도 분빠이(分配)가 일상화한 나라다. 서구 문화를 일찍 받아들인 영향이 크다. 남녀 대학생이 미팅을 하며 커피를 마셔도, 형제끼리 외식을 해도 각자 계산한다. 영어권에서는 고잉 더치(Going Dutch), 더치 데이트(Dutch Date) 등의 표현을 쓴다. 더치는 네덜란드 사람을 뜻한다. 한 턱 쏘는 문화가 있던 네덜란드에서 ‘대접’의 의미로 쓰이던 더치 트리트(Dutch Treat)라는 말을 영국이 ‘이기적이고 쩨쩨하다’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더치 페이(Dutch Pay)로 바꿨다.
▦ 분빠이, 더치페이의 순 우리말이 각자내기다. 김영란법이 ‘내 것만 내는’ 각자내기 문화를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 ‘직무 관련성’과 ‘원활한 직무수행’의 구분이 모호하다 보니 책잡히지 않으려면 각자내기가 최선이다.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밥값을 따로 계산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판사들에게 “애인만 빼고 모든 변호사와 각자내기 하라”는 지침을 줬다. ‘N빵 정산’, ‘링 마이 빌(Ring My Bill)’ 등 사람 수에 맞춰 각자 내야 할 식사 비용을 알려주는 앱도 등장했다.
▦ 애매하면 각자내기가 정답이라는 김영란법을 놓고 일각에선 ‘불신사회 조장법’, ‘인간관계 단절법’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밥값이든 술값이든, 평생 선배나 연장자가 내는 걸 당연시했던 내게도 각자내기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도 따져보면 장점이 더 많다. 각자 내면 저녁과 술 자리가 줄 수밖에 없다. 직무 관련자를 만나는 건 스트레스지만, 가족 친구와의 만남은 엔도르핀을 돌게 한다. 각자 계산하니 필요한 것만 시켜 과식하지 않고 자기계발에 힘쓸 시간도 늘어난다. 김영란법은 ‘행복증진법’이 될 수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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