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세로 사는 아파트의 충격적인 과거 얘기를 듣게 된 때는 입주한 지 2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파트 시공 관계자들이 공사 과정에서 철근을 빼 먹은 혐의로 구속됐다는 얘기였다. 설계상으로 12㎝ 간격으로 철근을 박아야 하는데, 실제 시공을 맡은 하도급 업체가 임의로 간격을 더 넓혀 철근을 심었다는 게 수사 결과다. 부실시공을 감독해야 할 감리 관계자도 뒷돈을 받았다.
이후 이 아파트는 보강 작업을 거쳐 행정청 안전검사를 통과했고, 다시 사람들에게 분양됐으며, 정상적으로 입주가 이뤄졌다. 외부가 보강됐다지만, 애초 철근이 덜 들어간 아파트가 설계상 계획된 안전 수준을 달성하기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세계약 과정에서 중개업자나 집주인은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법적으로 사전 고지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불안은 불감으로 바뀌며 섭섭함과 자책감도 차츰 옅어졌다.
이런 흑역사가 다시 떠오른 건 경주에서 규모 5.8 지진이 난 다음이다. 전진(前震) 50여분 후 본진(本震)이 왔을 때, 진앙에서 200㎞ 떨어진 이 곳 아파트도 흔들렸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지진을 철근 빠진 아파트에서 느끼니 불안감이 컸다. 내진설계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철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입주를 허가했던 바로 그 행정청은 “도시 전체의 내진 설계율이 93%에 달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고 대부분 건물이 규모 6.0~6.5의 지진을 견딜 수 있다”고 발표했다. 서류상 설계를 말하는 것이니, 93% 안에는 이 아파트도 포함이 됐을 것이다.
지진 이후 내진 설계를 강화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쏟아졌다. 내진설계 의무 대상이 ‘3층 또는 500㎡ 이상’에서 ‘2층 또는 500㎡ 이상’으로 확대되는 법 시행령이 입법예고됐다.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며, 내진설계 의무 대상은 점차 확대될 것이고 버틸 수 있는 지진의 규모 기준 또한 상향될 것이다.
하지만 이 곳 아파트 사례에서도 보듯, 진짜 문제는 내진의 설계가 아니라 설계가 과연 ‘시공’으로까지 이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내진 설계가 법령으로 강제되지만, 여전히 철근을 빼 먹거나 안전자재를 빼돌리다 적발되는 사례는 끊이지 않는다. 2013년 인천의 한 아파트(철근), 지난해 서울시의 버스정류장(철근), 지난해 대구ㆍ경북의 어떤 아파트(철근), 올해 전남의 대교(쇠기둥) 등 자재 빼돌리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검경이 특별단속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적발 사례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시공 현장의 자재 빼돌리기는 여전히 고질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다. 이 곳 아파트 철근 빼돌리기 사건으로 기소된 13명 중 실형을 받은 이는 단 한 명에 불과했고, 7명은 집행유예, 5명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부실시공에 대한 후속조치(보강공사)가 이뤄졌고, 대부분 초범인 점”이 재판부가 밝힌 양형의 이유다.
불공정한 하도급 구조도 건설 현장의 부조리를 조장한다. 원청이 가격을 후려치니, 하청은 자재 등을 빼돌려 이문을 보전하려 하는 것이다. 치열한 기술 경쟁 대신 손쉬운 담합으로 공사를 따내려는 사례가 끊이지 않지만, 정부는 광복절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건설사를 사면해 주곤 한다.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 만성적 자재 빼돌리기와 이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등 시공 현장의 이런 부조리를 그대로 둔다면 안전사회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 그래서 아직 한국사회의 안전은 설계와 시공 사이에 머물러 있다. 건설현장 전반의 부조리에 대한 특단의 대책 없이 그저 내진 설계 기준만 강화하려 한다면, 한국 사회의 지진 안전 수준은 여전히 ‘서류상 안전’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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