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 안해도 돼” 대법 판결에도
“소비자 보호 명분 대승적 결정”
금융당국ㆍ정치권 압박에 선회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난달 30일 대법원 판결(본보 10월1일자 6면)에도 불구, 그간 자살보험금 지급을 미뤄왔던 생명보험사 가운데 동부생명이 전격적으로 미지급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대승적 결정”이란 동부생명의 설명과 달리, 업계에선 ‘법(대법원 판결)보다 주먹(금융당국 검사ㆍ제재)’을 고려한 행동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금융당국과 정치권의 ‘지급’ 압박에 동부생명 이탈까지 더해지면서 미지급 생보사들은 한층 난감한 처지에 몰리고 있다.
2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동부생명은 대법원 판결 직전인 지난달 27일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난 2월 기준 140억원(119건)의 동부생명 미지급 자살보험금 가운데, 약 90%에 해당하는 123억원(99건)이 소멸시효(2년) 경과 보험금이었다. 따라서 법적으로 따지면 주지 않아도 될 123억원을 소비자들에게 지급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동부생명 관계자는 “소비자 보호를 위해 대승적으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갑작스런 동부생명의 ‘결단’에 그간 자살보험금 미지급 ‘공동전선’을 펴 온 나머지 생보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초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던 보험사는 총 14곳. 그러나 지난 5월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은 자살보험금은 약관대로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하고, 금융감독원이 “고객 신뢰 제고 차원에서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하라”고 보험사들을 압박하면서 보험사 7곳(INGㆍ신한ㆍ메트라이프ㆍPCAㆍ흥국ㆍDGBㆍ하나생명)은 차례로 소멸시효와 무관하게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동부생명을 비롯한 나머지 7곳(삼성ㆍ교보ㆍ알리안츠ㆍ한화ㆍKDBㆍ현대라이프생명)은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버텨 왔는데, 마침 대법원이 지난달 30일 교보생명의 미지급 보험금 관련 최종 판결에서 보험사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간 금융당국의 거센 압박을 가까스로 버텨왔던 생보사들은 내심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하지만 이번 동부생명의 결정으로 ‘대법원 판결 때문에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주기 어렵다’는 보험사들의 명분에도 적잖은 균열이 생기게 됐다. 한 대형 생보사 관계자는 “(동부 측 결정은)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최근 금감원이 동부생명을 현장검사 하는 등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버티지 못한 것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대법원 판결에도 아랑곳 않는 금융당국과 정치권의 압박도 나머지 미지급 생보사들에겐 부담이다. 금감원이 대법원 판결 직후, ‘애초 약관을 잘못 기재해 소비자 피해를 초래한 데 대한 행정 조치를 받게 될 것’이라며 고강도 제재를 예고한 것은 물론, 여야 정치권도 보험사 때리기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7월 주승용 국민의당 의원이 자살보험금 지급과 관련해 소멸시효의 효력을 없애는 법안을 발의한 데 이어, 최근 김선동 새누리당 의원 역시 비슷한 취지의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섰다.
한 보험사 고위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로 일단 부담을 덜었다 싶었는데, 금융당국이 제재의 강도를 높인다고 하니 난감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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