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 사무실을 비우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여덟 포기 바질(이탈리아 향신료 식물)의 안위였다. 다른 업무야 미리 당기거나 늦추거나 혹은 여행지에서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게 가능했다. 단 하나 베란다에서 자라는 바질은 매일같이 물을 주어야 생존한다. 떠나면서 동료에게 부탁은 했다. 다른 화초들은 금요일에 한 번만 물을 주되, 베란다에 있는 바질은 번거롭더라도 이틀에 한 번씩은 물을 주어 달라고.
여행지에서 앙트레(전식ㆍ前食)로 나오는 파스타를 먹을 때마다 베란다의 바질을 생각했다. 시들어 죽지 않고 잘 버티는지…. 한갓 식물에 대한 애정이 유난스러운 데에는 그만한 이야기가 있다.
작년 가을. 하이서울 페스티벌이 열리던 때 서울광장에 갔다. 광장을 둘러싼 행사 부스들을 둘러보는데 선량한 표정의 청년 하나가 막대사탕처럼 생긴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셀로판지에 동그랗게 싸여 플라스틱 막대까지 꽂힌 모양새가 영락없는 추파춥스였다. “바질 씨앗이에요.”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포장을 벗겨 화분에 그대로 심으면 된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날 여기저기서 물티슈나 밴드, 부채 등을 받았는데 내 마음에 가장 흡족한 선물이 바로 이 흙 구슬이었다.
돌아와 셀로판지를 벗겨보니 꽤 많은 씨앗이 흙 속에 숨어 있었다. 흙 구슬을 검지로 살살 허물어뜨린 다음 사무실 베란다에 있는 모판 크기 화분에 듬성듬성 뿌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좁쌀만 한 싹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제법 모종 형태를 갖춘 녀석들을 두 포기씩 짝지어 분갈이했다. 총 열두 포기를 낡은 에코백과 복숭아 궤짝으로 만든 화분에 이주시켰더니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바질은 허브 식물 중 키우기가 비교적 쉽다. 겨울이 물러나고 햇볕이 따스해지자 녀석들은 왕성한 생장 속도를 자랑했다. 그 열정적인 분투가 다른 이의 눈에도 남달랐던가 보다. 초봄, 사무실에 놀러 온 손님 하나가 팔랑거리는 연둣빛 잎사귀에 반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노골적으로 탐을 내는 그에게 화분 두 개를 선물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잎을 따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샐러드와 파스타를 해먹고 약식 피자에도 곁들였다. 폭염이 맹위를 떨치던 여름에는 넉넉한 양의 바질 페스토까지 만들어둘 정도로 엄청난 양을 수확했으니, 내게는 각별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출근하자마자 베란다로 갔다. 무사했다. 가을 햇살을 맞아 잎사귀들이 순한 초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 없는 사이 동료가 나름의 방식으로 수확한 흔적이 보였다. 위로 솟은 가지에 흰색 꽃들까지 새로 맺혔다. “쟤들 자라는 속도가 정말 장난 아니던데요. 두 번이나 한 봉지씩 따가서 스파게티를 해먹었는데도 저래요.” 내 뒤로 온 동료의 목소리에서 감춰지지 않는 뿌듯함이 묻어 나왔다. “씨앗을 받아야겠어요. 내년 봄에는 우리 집 텃밭에서도 좀 키워볼 참이에요.”
아하! 일종의 깨달음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욕망하는 식물’을 쓴 작가 마이클 폴란은 말했다. 식물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 욕구를 끊임없이 충족해왔다고. 아름다움으로, 효용가치로, 맛으로…, 서로의 욕망을 이용하고 만족시키면서 인간과 식물은 공진화를 거듭해왔다고. 그러니까 330일 넘는 날을 내 보호에 기대 태어나고 생존해온 바질들은, 불과 열흘 사이 다른 인간의 욕망을 파고들어 번식이라는 더 큰 과제를 해결해낸 셈이다.
하얗게 피어난 여린 꽃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꽃봉오리 맺을 틈조차 주지 않고 똑똑 새순 따먹는 데만 열중하던 내가 자리를 비운 그 며칠이 녀석들에게는 얼마나 큰 기회이고 축복이었을까. 공연히 민망해지면서 헤픈 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가만히 앉아 바질들에게 속삭였다. ‘그래, 너희들 참 장하구나. 목표 달성한 걸 축하한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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