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출판사 첫 책] 도서출판b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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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도서출판b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2003)

입력
2016.09.3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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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도서출판 b는 조금 늦게 탄생했어야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이미 21세기가 시작되었고 내 나이가 마흔이 되던 해였다. 세기 초와 같은 혹은 실존적인 막연한 초조함 속에서, 출판사 창립과 관련하여 어떤 경험이나 준비도 없이, 마치 혼기를 놓친 사람이 애부터 낳고 살림을 차리는 형국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전까지 기계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IMF의 여파로 인해 실직을 한 상태에서 노느니 공부나 한다고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 등을 읽는 세미나에 들락거렸다. 바로 거기서 나의 파트너 이성민씨를 만났다. 이성민씨는 그 무렵, 조금 늦었다 싶은 시기에, 미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는데 곧 ‘배울게 없다’며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된 두 백수 신분은 죽이 맞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았다. 술자리의 주제는 세미나의 내용으로 시작해서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무능에 대한 자책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먼저 불쑥 출판사나 차려보자고 제안을 했고 이에 좋다고 응수를 한 듯한데 둘 다 술기운을 빌렸음은 물론이다. 곧바로 양가 사모님들께 사업자금으로 각각 한 달 생활비 수준의 쌈짓돈을 빌려다 사무실을 얻고 집에 있는 컴퓨터를 들고 와서 상호를 ‘도서출판 b’라고 멋지게 지어 출판 등록을 했다.

기획된 도서 목록 하나 없이 출판사는 그렇게 차려졌고, 더더욱 기계 기술자와 미학연구자가 만났으니 융복합이나 통섭 차원에서는 그럴듯하나 출판 업무에 관한 지식이나 사업적 관점이 전무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창업 연도에 첫 책이 나와야 한다는 헛물만 김칫국처럼 들이켰다. 나는 즉시 편집 공부를 시작했다. 소위 명문출판사의 도서를 해체하여 쪽모양이나, 글자모양, 여백, 행간 등등에 자질을 하며 편집 플랫폼 구성을 시작하였다. 이성민씨는 당시 인기가 있던 들뢰즈를 넘어서 라캉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잡아내고 ‘슬로베니아학파 총서’라는 이름으로 기획을 해냈다.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알렌카 주판치치 등의 번역 작업을 동시에 착수했다.

그 가운데 지젝을 제치고 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을 출판사 첫 책으로 출간했던 것은 제목이 섹시해서였다. 표지 디자인은 명문 디자인회사인 미라클인애드가 맡아 황홀할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오고 나서야 첫 책의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다. 책이 16쪽이나 32쪽으로 인쇄가 된다는 것을 몰라 책의 말미는 너덜거리고, 인문학계 번역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이성민씨조차 살레츨을 살레클이라 오기하는 등 태어나면서부터 상처투성이였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 출판사 첫 책은 ‘슬로베니아학파’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인문학계에 나름 한 경향을 만들어내고자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며 10여 년 만에 초판 1,000부 매진을 기록했다.

조기조 도서출판 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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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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