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세월만으로 인간은 역사가 되게 마련이지만, 이 시인에게 역사란 한층 각별하다. ‘나는 8·15였다/ 나는 6·25였다/ 나는 4·19 가야산중이었다/ 나는 곧 5·16이었다/ 그뒤/ 나는 5·18이었다’로 이어지는 시의 제목이 ‘자화상에 대하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시로 역사를 썼다는 말은 흔히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의미로 오독되지만, 첨예한 언어로 겪어낸 오랜 삶이 불가피하게 ‘그 때’를 뒤돌아보며 호출할 때, 역사는 그야말로 역사가 된다.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으로서의 역사.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 봉제선이 없는 그 역사 속에서 인간은 너무 미미해 슬프고도 두렵다. 여든 셋의 고은 시인이 아니고선 줄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다.
시력 58년의 고은 시인이 새 시집 ‘초혼’(창비)을 냈다. 102편의 신작시에 소월의 노래를 빌어 쓴 원고지 130매 분량의 장편 굿시 ‘초혼’을 더해 묶은 3년 만의 신작시집이다. 선시적 면모 여전한 언어는 간결하여 아름답고, 삼라만상 주유하는 상상력은 살아온 오랜 세월과 합을 이뤄 장대하고도 아득한 서글픔을 남긴다.
저 옛적 상고시대부터 오늘날의 구글 알파고까지, 아니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먼 미래까지, 시인은 특유의 우주적 상상력으로 비상하며 시제(時制)의 구분을 무화한다. “한낱 입자도 파동일진대/ 나의 명사는/ 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동사에게 가야 한다//(…)나는 그리운 그리운/ 선사(先史) 타동사로 가야 한다// 오늘밤 미래가 미래뿐이라면 그것을 거부한다.”(‘내 조상’)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한낱 티끌로서의 인간 운명을 이제 와 한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흐름이라는 운동의 형태로 진행되는 역사와 역사라는 타동사의 명사로만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관계를 시인은 성찰하고 있는 중이다.
타동사에 떠밀려가는 명사로서의 삶에 공허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공허는 생의 의미를 습득하는 지름길이어서 햇빛은 겨울의 것이 되레 충만하다. “겨울 햇빛 너는/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가만가만/ 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겨울 햇빛에 대하여’).
여든 넘은 아들이 점점 더 내려앉는 어머니의 무덤가에 누웠다.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부르던/ 다섯살의 나는 다 지워져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여든한살의 묵은 목젖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더니 “저만치서 할미산 할미꽃 서넛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피어나 졸고 졸다가 깨어 있”(‘성묘’)다.
오래 산다는 것은 더 멀리 축출당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여 팔순의 시인이 퍼뜩 삶의 단절을 깨달을 때, 끊임없이 축적되고 확장되는 역사는 가일층 막막하다. “고향이란/ 그토록 골수와도 같은 사실이던 것으로부터/ 육십년 뒤로는/ 허구가 된다”는데, 시인은 까마득한 저 옛날 “내 젖먹이 적 젖내 나는 무위여 네가 그립다”고 말한다. “만고의 의미 어리석건만. 의미 없이는/ 너무/ 너무/ 이 세상 남은 것 허전해버려” 시인은 “돌멩이가/ 돌멩이의 의미이고/ 파도가/ 파도의 의미”이듯 “나 또한 아니꼽살스러이 나의 도도한 의미여”라고 읊조린다. 무의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의미의 변증법이다.
시집에는 시를 쓴다는 행위에 대한 성찰이 빈번하다. “언어는 이미 언어의 죄악인 것”이라 그 무엇도 온전히 말해질 수 없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나는 살았”던 탓에 시인은 “시의 무기수라는 천벌 감수하며/ 내 조국을/ 내 조국 밖을 유배의 세월로 삼아”올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자주 폭력의 실체였”고 “나의 노래는 끝내 추락하는 축복”이었기에 “나의 팔십여년”은 “팔만 사천 쓰레기 노래”다. “오늘도 쓰레기 두보따리와 쓰레기 노래 몇 편을 내놓는다”는 게 새 시집을 내놓는 시인의 변(辯)이다.
해설 ‘불멸의 시인’을 쓴 조재룡 문학평론가는 “시인은 무수한 사건과 숱한 시간들, 다양한 장소를 사그라지지 않는 메아리처럼 백지 위로 끌어내었지만, 그의 시가 역사를 움켜쥐는 방식은 개인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모색되는 시의 새로운 길이기도 했다”며 “그에게 시는 개별자가 부르는 공동체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끊임없이 나이를 의식하며 “나 또한 오지 않는 임종 같은 지긋지긋한 나이”라고 일컫는 시인은 “지난날로 충분하다는 감회는 어이없다”며 현역시인의 위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끝맺는 말에 이내 철렁해진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토록 숨찰 것도 없지 않은가.”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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