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11시 서울 관악구 한 은행 지점에서 다급한 112 신고가 들어왔다. “민원인에게 폭행을 당해 기절한 상황에서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털려 현금이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신고자는 30분 전 “ATM기에서 카드가 빠지지 않는다”는 김모(23)씨의 민원을 접수하고 출동한 경비업체 직원 노모(24)씨였다. 김씨는 노씨가 ATM기에서 카드를 꺼내주자마자 강도로 돌변했다. 김씨로부터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탓에 노씨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곧 이어 김씨가 기절한 채로 죽은 듯이 누운 노씨를 구석으로 옮기고 내부 폐쇄회로(CC)TV 카메라를 사각지대로 돌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녹화됐다. 이후 30분 사이 김씨는 해당 은행 ATM기 4대에서 9,400여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수사는 쉽지 않았다. 범인이 모자와 마스크를 써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데다 은행 바깥 CCTV 화면이 어두워 행적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CCTV 영상을 꼼꼼히 살피던 경찰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갑자기 사타구니를 맞을 경우 보통 아픈 부위를 움켜 쥐며 앞으로 고꾸라지기 마련인데 노씨는 별로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뒤로 넘어진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급소를 다치면 보통 배와 다리를 오므리는 것과 달리 피해자는 두 부위를 늘어뜨리고 누워 있었다”고 설명했다. 노씨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은 점도 수상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사흘 후인 26일 노씨를 불러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근거로 집중 추궁했고, 그는 그제서야 김씨와 짜고 자작극을 벌였다고 실토했다. 김씨가 CCTV 방향을 돌려놓자 기절한 척 했던 노씨는 다시 일어나 갖고 있던 ATM기 열쇠로 문을 열고 돈을 훔쳤다. 공범 김씨도 곧 붙잡혔다.
조사 결과 친구 사이인 피의자들은 금전 문제를 해결하려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학 휴학생인 노씨가 등록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ATM을 털자고 먼저 제안하자 군복무 뒤 다단계 빚 때문에 고민 중이던 김씨도 범행에 가담하기로 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특수절도 혐의로 두 사람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28일 밝혔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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