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곤 국제부장 jkkim@hankookilbo.com
세기의 대결은 예상대로 흥미 진진했다. 26일 미국 대선 후보 1차 TV토론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내치와 대외정책, 사생활 이슈 모두를 꺼내놓고 전방위로 충돌했다. 대부분 언론이 충돌(clash), 불꽃(spark) 등의 단어를 동원한 것만 봐도 토론의 열기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토론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마다 다소 엇갈리고 매체마다 제각각이지만 대체적인 평은 클린턴 우세였다. 실제 클린턴은 공붓벌레답게 차분한 어조로 조곤조곤 자신의 강점을 피력하고 흥분하지 않은 채 공격을 방어해 냈다. 반면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을 피력하고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 시종일관 오바마 행정부와 클린턴을 싸잡아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토론 중간중간 상대 후보의 말을 끊고 심지어 진행자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에서는 유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쯤 되면 TV토론을 보고 후보를 결정하겠다는 약 30%의 부동층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다.
대선 레이스 내내 지속돼 온 클린턴 대세론에 비춰볼 때 과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NBC 방송에 따르면 역대 대선 레이스를 통틀어 TV토론이 선거 결과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2000년 단 한 차례뿐이었다. 당시 민주당 앨 고어는 TV토론이전 여론조사에서 조지 W부시에게 밀리고 있었지만 토론을 거치면서 지지율 역전에 성공했고, 실제 선거에서도 선거인단 경쟁에서는 졌지만 일반투표에서는 이겼다. 나머지는 TV토론 당시의 지지율이 그대로 선거결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직 미국 대선을 이미 끝난 게임으로 보기는 일러 보인다. 고어의 사례가 말해 주듯이 토론을 잘하는 후보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2차, 3차 토론의 기회도 남아 있기에 트럼프 캠프도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4년 전 1차 TV토론에서 경제인 출신의 밋 롬니 후보에게 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머지 두 차례에서 역전을 일궈냈다. 이번에도 힐러리가 대체로 무난하게 트럼프를 제압했지만 대통령감이라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는 일각의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미국 대선 TV토론은 여러모로 4년 전 우리 대선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TV토론의 화제는 단연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독설이었다. “당신을 떨어뜨리려 나왔다”는 가시 돋친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이 후보는 박근혜 당시 후보를 “구시대 제왕적 리더십의 전형” “유신독재의 퍼스트레이디”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여왕” 이라는 말로 몰아붙였다. 이 후보의 독설을 트럼프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박 후보는 이 후보의 거친 공세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게 대체적 평이었다.
양강인 박 후보와 문재인 후보와 토론 승부는 대체로 문 후보의 우세였다. 참여정부 행정 경험을 토대로 문 후보는 경제와 안보, 남북문제 등에서 막힘 없는 소신을 밝혔고 토론 스타일도 점잖았다. 비교하자면 클린턴 후보에 가까웠다. 반면 박 후보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준비된 내용을 그대로 읽는 등의 모습으로 준비부족을 역력히 드러냈다. TV토론이 끝난 뒤 평가를 선거결과로 연결시키며 쾌재를 부르던 당시 문재인 캠프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TV토론 평가와 달랐다.
TV토론이 선거 결과에 미치는 효과를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TV토론에 앞서 다양한 매체에 노출되면서 고정된 후보의 이미지가 토론회 한번으로 변할 리도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살피면 토론에 능하지 못한 유능한 리더도 적지 않을 것이고 토론에는 강하지만 리더가 되지 못하는 정치인들도 많을 것이다. 최상은 토론을 잘 하면서 선거에서 이겨 멋진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우일 것이다. 최악은 토론도 못하면서 선거에서 이겨 국정을 망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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