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한 건물 명도-철거 소송
작년 3만여건 민사소송의 11%
4년간 1위 대여금 추심 추월
소송결과는 건물주 승소 압도적
불경기 고통 세입자들 또 눈물
“임대차보호법 손봐야” 목소리도
“해마다 10만원씩 월 임대료를 더 올려주고 5년간 더 머물도록 집주인과 약속이 됐는데 제가 왜 쫓겨나야 하나요.”
2014년 12월 건물주 W씨로부터 “그만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고 버티다 이듬해 소송을 당한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 주인 S씨는 법정에서 이런 취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판사는 “건물주의 그런 구두 약속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지난 22일 가게를 비우라는 주문을 내렸다.
2009년 초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씩을 주고 8평(27.77㎡) 남짓한 공간에서 생계를 이어온 S씨는 법원 판결로 더는 버티기 힘든 궁지에 몰렸다. 2013년 3월 임대차 계약 갱신 때 월세를 두 배로 올려 100만원을 주기로 했었고, 이에 더해 계약 만료시 권리금 등을 일절 요구하지 않겠다는 특약까지 약정했다. S씨는 그렇게라도 가게를 지키고 싶었다. 이후 건물주의 요구로 월세를 10만원 더 올렸지만 결국 2014년 말 갱신 거절 통보가 S씨에게 떨어졌다. 앞서 맺은 약정으로 인해 S씨는 권리금 주장을 할 수 없었고, 가게 밖 담장을 높이고, 구조보강 빔과 한옥 나무기둥 등을 넣은 데 들인 돈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
S씨 사례처럼 건물주로부터 “집이나 점포를 빼달라”는 통보를 받고 버티다 소송(건물명도)을 당해 법원을 찾는 세입자들이 늘고 있다. 26일 법원행정처의 ‘2016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건물명도ㆍ철거 소송은 3만4,566건으로 전체 민사소송(30만4,319건ㆍ소액사건 제외)의 11.4%로 가장 많았다. “빌린 돈을 갚으라”는 대여금 청구 소송은 2011년부터 법정 다툼 원인 1위였지만 지난해 3만 3,458건(전체의 11%)이 접수돼 건물명도ㆍ철거소송에 밀려났다. 어려운 경기에 팍팍한 세입자들의 숨통 막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다.
서울의 한 법원 민사부 판사는 “빌린 돈 갚으라는 소송보다 가게 빼라는 소송이 더 많았다는 게 놀랍다”며 “계약 만료가 됐거나 전월세 인상 요구에 버티는 세입자들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종로구에서 2011년부터 C 음악카페를 운영하던 부부는 월세와 수도료 등 5,200만원을 내지 못해 참다 못한 건물주인으로부터 “이제는 카페를 접으라”는 소송을 당해 지난달 패소 판결을 받았다. 부부는 “가게에서 자살과 타살이 있었고, 물이 새는 데 건물주가 알려주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해봤지만 소용없었고, 캐나다인 건물주는 부부의 보증금 1,300만원을 챙겼다.
소송 결과를 보면, 지난해 건물주(원고)가 소송에서 이긴 사건은 1만7,998건(일부 승소 포함)에 달했다. 반면, 건물주가 진 사건은 527건에 그쳤으며, 소 취하는 8,683건으로 집계됐다. 건물주가 법의 테두리를 넘은 퇴거 요구를 한다기보다는 버티는 세입자에 불만을 품고 소송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가수 싸이, 리쌍 등 건물을 소유한 연예인들이 세입자와 갈등을 빚은 사례에서 보듯 건물주의 퇴거 요구에 대해 지역문화운동 차원에서 대항하는 세입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퇴직금 등을 털어 수억원의 권리금과 시설ㆍ공사비를 내고 투자금을 뽑기도 전에 쫓겨나는 세입자 처지를 고려하면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이 임차인들의 권리 보호를 더 보장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법무법인 도담 김영주 변호사는 “경기가 아무리 바닥을 쳐도 월세는 두 배, 세 배 오르므로 사실상 나가라는 건물주의 강요가 많다”며 “환산보증금(보증금과 월세 환산액을 합한 금액으로 ‘월세×100 + 임대보증금’으로 산출) 4억원 이하인 경우만 임대료 인상을 9%로 제한하는 규정이나, 재개발ㆍ재건축 때는 계약갱신을 거절해도 된다는 예외사유를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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