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9월 26일
프리다 커츠웨이(Freda Kirchwey)는 미국의 진보 자유주의 매체 ‘The Nation’을 이끌며, 전간기 불황과 파시즘 세계대전 매카시즘의 시대를 헤쳐나간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다. 시대의 가파름 탓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반파시즘ㆍ반제국주의 신념을 자유주의적 가치와 원칙보다 앞세워 매체 지지자들과 불화하기도 했다.
커츠웨이는 신제국주의와 진보의 기운이 힘을 겨루던 1893년 9월 26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학자였던 그의 부모는 여성 참정권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지하던 평화주의자였다. 커츠웨이는 뉴욕 바너드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여성평화당(WPP) 당원이었고, 1915년 졸업한 뒤 뉴욕트리뷴 등 여러 매체 기자로 일했다. 18년 ‘The Nation’에 입사했고, 33년 미국의 전국매체 최초의 여성 편집장이 됐다. 마거릿 생어 등의 활동을 지지하며 그는 26년 한 칼럼에서 “여성 혁명은 20세기 전반의 그 어떤 사회변혁보다 도드라진 성취를 이룰 것이다.(…) 첫 출항의 기대에 부푼 신출내기 선원의 열정과 불편처럼, 멀미를 극복한 여성들이 펼쳐나갈 미래의 진전된 시대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고 썼다. 35년에는 유럽의 파시즘을 우려하며 “향후 10년의 근본적인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혁명이 아닌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립이 될 것이다”라는 적확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고립주의를 맹비난하며 조기 참전을 촉구, 자유주의 진영과 갈등을 빚었다. 뉴딜정책에 제동을 걸던 대법원을 개편하려던 루스벨트의 시도(루스벨트는 37년 대법관의 고령화를 핑계로 법관 수를 9명에서 최대 15명까지 늘리려고 했다)를 역성 들었고, 미국 내 친 파시즘 매체들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 찬성하기도 했다. 발행인의 반발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37년 아예 매체를 사들였고, 40년대 독자들의 이탈로 경영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지분을 처분해 비영리기구(Nation Association)를 설립하는 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그의 완고함에 오랜 동지였던 노먼 토머스는 42년 커츠웨이가 억압자를 억압하기 위해 ‘원칙의 억압(루스벨트 전체주의)’에 굴복하고 있다며 이렇게 썼다. “루스벨트도 그 누구도 영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번 수립된 원칙은 인간보다 끈질기게 지속될 것이다.”
커츠웨이는 55년까지 The Nation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76년 별세했다. 그의 신념은 때로는 위험했지만, 20세기 중반 미국의 이념적 시련과 인권적 성취에 큰 족적을 남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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