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역할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듯 내시도 아무나 할 수 없다. 대개 주인공인 왕을 보좌하는 내관 역할이야말로 연기파 배우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이다. 왕의 뒤에 서서 사실과 거짓을 저울질하며 위태로운 일상을 이어갔을 실제 내관들의 삶이 그렇듯 영화나 드라마 속 내시 연기도 녹록하진 않다. 왕에게 조언을 아끼지는 않는 ‘멘토’를 담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코믹한 말로 왕의 긴장을 풀어줘야 하는 등 변화무쌍한 연기가 가능해야 한다. 사극 속 왕을 뛰어넘는 연기를 펼친 내시들을 살펴봤다.
따스한 내시의 표본, 정은표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해품달’)하면 이훤(김수현)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형선(정은표)이다. 훤과 연우(한가인) 커플보다 훤과 형선의 케미스트리가 더 돋보인 것도 사실이다. 세자시절부터 훤을 보필하던 형선의 따스함은 ‘해품달’을 휴먼 드라마로 만든 원동력이다. 40%가 넘는 시청률에는 건 김수현 한가인을 넘어 정은표(50)의 공도 들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케미’는 마지막 회까지 절정을 이뤘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훤은 연우와 혼인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중전 연우의 생일 이벤트를 준비하던 왕은 가야금 연주를 해주고 싶다고 연습에 돌입한다. 가야금 명인까지 초빙하는 등 속성 과외를 받지만 제자리다. “악기가 어찌 이 모양이냐!”며 가야금 탓을 하는 왕에게 형선은 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다. “뭐 따로 배운 바는 없고, 전하께서 배우실 때 어깨너머로 보아 두었다가”라며 우쭐대며 가야금을 연주하던 형선.
결국 왕은 중전 앞에서 ‘가짜’ 가야금 연주를 선보인다. 왕을 대신해 뒤에서 멋들어진 가야금 연주를 하는 형선의 모습에서 김수현과 정은표의 찰떡 궁합 연기가 빛을 발했다. ‘해품달’ 최고의 커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싸움도 하는 내시, 이준혁
KBS2 월화극 ‘구르미 그린 달빛’(‘구르미’)에도 ‘해품달’의 형선 못지 않은 내관이 등장하고 있다. 표정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자 저하~”를 외치며 종일 이영(박보검)을 쫓아다니는 그는 장 내관 역할의 이준혁(44)이다. 팔 자(八) 눈썹을 하고는 늘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영을 바라보는 장 내관의 모습은 이훤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형선과 다르지 않다.
동궁전의 살림을 꾸려가는 장 내관은 이영을 위해 싸움도 불사한다. 홍라온(김유정)을 향한 이영의 남다른 감정이 궁 안에 퍼지자, 그는 다른 내관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장 내관은 자초지종을 묻는 이영에게 “내관들 사이에서 세자 저하를 두고 남색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세자 저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등 여러 목격담이 돌고 있사옵니다” 등 걱정스런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홍대홍, 영화 ‘봉이 김선달’에선 장물아비로 나왔던 이준혁의 코믹 연기를 떠올리면 ‘구르미’에서의 호연은 당연하다.
광해를 지키던 부드러운 카리스마, 장광
광해의 옆을 지키던 조 내관이 이번에는 이영의 곁에서 서 있다. 배우 장광(64)은 4년 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에서 천민 하선(이병헌)이 왕의 대역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하던 조 내관이었다. 하지만 내시부의 수장으로 등장하는 ‘구르미’에서는 홍라온의 정체를 알고 숨통을 조여오는 내관 한상익으로 변신했다. ‘광해’와 ‘구르미’에서 상반된 내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에게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광해군의 행적이 15일 동안 사라졌다는 조선왕조실록을 모티브로 한 영화 ‘광해’에서 장광은 하선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를 왕으로 대하는 내관이다. 그는 점점 폭군으로 변해가던 광해와 달리 소탈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하선을 인자한 미소로 대한다. 그러나 ‘구르미’에선 180도 달라졌다. 지난 20일 방송에서 한상익이 홍라온을 찾던 비밀 조직 백운회의 수장으로 밝혀지면서 엄청난 후폭풍을 예고했다. 장광의 숨막히는 카리스마 연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꽃미남’ 내시, 최우식
조선시대 왕세자를 지키던 내시가 300년 뒤 대한민국으로 떨어진다면 어떨까.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세자 이각(박유천)과 그를 보필하던 3인방 송만보(이민호), 도치산(최우식), 우용술(정석원)이 미래로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세자와 현시대를 사는 박하(한지민)의 러브스토리가 중심이었지만,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은 세자를 지키던 ‘꽃미남’ 3인방이 더 짙게 남아있을 듯하다.
파랑 노랑 초록의 트레이닝복을 차려 입고 박유천의 ‘몸종’을 자처한 세 사람. 그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최우식이다. 드라마에서 코믹을 전담할 정도로 능청스런 내시 도치산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박하 누이, 박하 누이”하며 한지민을 부르던 애교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엉뚱한 행동도 폭소를 자아냈다. 할 줄도 모르는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차 문을 열고 수세미로 시트를 닦고, 물까지 끼얹는 ‘엽기’ 행각을 벌이는 등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도치산 역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최우식은 영화 ‘거인’(2014)으로 제36회 청룡영화상 신인 남우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력을 인정 받았고, 그 이듬해 tvN 드라마 ‘호구의 사랑’의 주인공 강호구까지 꿰찼다. 올해는 좀비로부터 친구들을 지키려던 고등학생 영국으로 변신한 영화 ‘부산행’으로 ‘천만 배우’가 됐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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