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두뇌발달에 효과적’ 뜬소문
‘우리 아이 수포자 될까’ 불안감에
스토리텔링 문제지, 교구 불티
학계 “불안심리 이용한 상술일뿐”
2, 3세에 가르쳐도 별 의미 없어
스트레스가 아기 발달 막을 수도
‘A와 B가 오목을 하고 있다. 오목은 5개의 돌이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한 줄이 되면 이기는 게임이다. 돌을 놓다 보니 검은 돌을 놓은 B가 이겼다. A는 놓인 돌의 모양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과 같은 모양(그림)을 4개 만들려면 흰 바둑돌은 모두 몇 개가 필요한가?’
4개월 임부 신나래(33·가명)씨는 최근 초등학교 2학년 스토리텔링 수학문제집을 샀다. 2학년용이라고 해도 마치 말장난을 하듯 비비 꼬아놓은 문제 때문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풀고 나면 수리능력뿐 아니라 창의력까지 좋아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신씨는 “중학생 때부터 수학과 담을 쌓았지만 아이는 수학을 잘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수학태교가 아이 두뇌 발달에도 좋다는 말이 있어 매일 4장씩 꾸준히 푸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는 “주변에 고등학교 문제를 푸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진 않다”고 덧붙였다.
예비 엄마들 사이에 수학태교가 다시 번지고 있다. ‘임신부가 수학을 가까이 하면 아이 두뇌발달에 효과적이고 논리적이 된다’는 그럴싸한 믿음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선배 엄마들의 조언처럼 등장하면서 열공하는 분위기다. 여기에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 이른바 수포자가 점차 늘고 있다는 언론 보도로 민감해진 엄마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한 상술도 더했다.
실제 23일 본보가 확인한 결과 임신부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수학태교를 부추기는 글들이 다양하게 올라와 있다. ‘옆집 아이가 명문대 공대에 입학했는데 알고 보니 수학태교를 했다’ ‘(수학태교 덕에) 다섯 살짜리도 구구단을 척척 외운다’는 식이다. ‘방법을 알려달라’ ‘임신 6개월인데 너무 늦은 건 아니냐’는 상담 요구 글도 줄을 잇는다. 학창시절 수학을 못했던 예비 엄마들은 “내 아이만큼은”, 귀가 얇아진 임신부들은 “내 아이도” 수학을 잘하길 바란다.
수학태교는 유행까지 타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수학의 정석’ 등 고교 문제나 19×19단 외우기가 주를 이뤘다. 임신부들끼리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학습지를 풀기도 했다. 반면 최근에는 ‘초등학교 1, 2학년 수학교과가 더 어려워진다’ ‘요즘 초등 수학은 연산이 아니라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사고력과 언어능력을 요하는 스토리텔링식 문제지나 관련 교구가 각광을 받고 있다.
수학태교가 진행되는 수업이나 문화센터 강좌는 대기를 해야 들어갈 정도다. 임신 5개월의 임모(33)씨는 얼마 전 한 태교수업에 참여한 뒤 칠교퍼즐(일곱 개 조각으로 도형을 만드는 놀이), 펜토미노(같은 크기의 정사각형 5개를 붙여 만든 12개 조각으로 도형을 만드는 놀이)세트를 구매했다. 강사가 “교구를 이용하면 아이의 수학적 사고력과 공간지각력을 키울 수 있다”고 추천했기 때문. 임신 8개월의 황모(30)씨도 4개월 전부터 소마큐브(정육면체 3, 4개를 붙여 만든 7개 조각으로 입체도형을 만드는 놀이)와 스토리텔링이 접목된 수학문제집 풀이를 병행하고 있다. 황씨는 “초등학생 조카의 수학 문제를 보고 우리 때와 달라 당황했다”며 “단순 문제 풀이보다 도형 놀이나 생각하는 수학으로 창의력을 키우는 게 요즘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학태교 바람은 부모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한 것일 뿐 실제 아이의 수학능력이 높아진다는 근거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물론 도형 만들기 과정에서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는 것은 엄마와 태아에게 긍정적이지만 그것이 창의력이나 논리적 사고와 직결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김효원 서울아산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수학태교는 성취지향적 사회 분위기와 부모들의 불안이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라며 “2~3세 때 시키는 수학 교육도 큰 의미가 없는데 태아 때 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김영주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임신부가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수학태교를 할 경우 자궁수축이 발생해 오히려 태아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며 “음악이든 산책이든 엄마가 편한 상태에서 즐길 수 있는 태교가 가장 좋은 태교”라고 조언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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